다리 아래 교각 옆에서 애인과 만나기로 한 청년이 소나기로 물이 불어났으나 약속 때문에 계속 자리를 지키다 결국 익사했다고 한다. 물론 애인은 이러한 소나기라면 교각 옆에서의 약속은 저절로 취소되었음이 마땅하다 여겨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을 게다. 휴대폰도 없었던 지금부터 2,500년쯤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지금의 산동지역 노(魯)나라에서 있었던 실화(?)다. 미생(尾生)이라는 그 청년의 믿음, 곧 '미생지신(之信)'의 의미를 둘러싸고 한나라당이 법석을 떨고 있다. 거의 춘추전국시대 모습이다.
상반된 해석 내며 대립만 키워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가 세종시 수정안에 동조하면서 이 고사를 얘기했는데, 약속만 고집하다 '교각을 붙들고 물에 빠져 죽은' 미생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헌데 이 말이 '세종시 원안을 붙들고 여론의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의미와 오버랩되면서 원안을 고수하는 쪽의 반발을 사고 있다.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려 했던 미생이 뭐가 잘못됐느냐는 항변이다.
당시 노나라에서도 미생의 사건을 둘러싸고 백성들 사이에 논쟁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공자의 말씀이 사회적 합의의 기준이었던 그 때 그 나라에선 미생지신을 곧 신의의 표상으로 여겼던 듯하다. 당시 소진(蘇秦)이란 자가 북쪽 연(燕)나라에 가서 왕에게 면접시험을 보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도 그렇게 신의를 지키겠다고 하여 크게 출세했다. 그는 이후 외교책략의 대명사인 합종연횡(合縱連衡)에서 '합종'을 완성하여 혼란의 와중에서 약소국인 연나라를 보존하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공자와 대립각을 세웠던 춘추시대 송(宋)나라 철학자 장자(莊子)는 미생지신을 반대로 해석했다. 장자는 미생의 죽음을 '물에 떠 내려가는 돼지' 등으로까지 비하하며 무의미한 원칙론에 얽매여 소중한 목숨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그가 공자의 신의관(信義觀)이 교조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 내용은 적지 않으나 이처럼 신랄하게 비난한 내용은 많지 않다.
정몽준 대표가 세종시 문제에 곁들여 언급한 미생지신은 소진의 그것이 아닌 장자의 그것일 터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박근혜 전 대표의 반응이 참 흥미롭다.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지만 그 애인은 그렇지 못했다. 미생은 죽었으나 귀감이 됐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소진의 미생지신을 따르는 듯 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 괴로움과 손가락질을 받게 되리라는 애인의 장래에 액센트가 주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소진 플러스 알파'의 해석인 셈이다.
미생지신이라는 고사성어를 둘러싸고 현 대표와 전 대표가 겉으로는 조용하고 점잖게 해석들을 붙이고 있지만 그 내면의 신랄함에는 적개심마저 배어 있는 듯하다. 인식차이가 이렇게 크고 감정의 골이 그렇게 깊다면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말이 국민들 사이에 파다하다.
미생지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선택과 공감의 문제다. 연나라처럼 소진을 등용해 국가의 안위를 유지할 수도 있고, 송나라처럼 장자의 인식에 공감하여 사회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정치 집단이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공감이다. 더 최소한의 요구라면 공감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공감확대 노력 없인 존재 불가
미생이라는 청년의 믿음이 어떠냐를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국가면 국가, 정당이면 정당, 모두가 믿음이 없으면 잘되고 못되고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루미와 여우의 우화처럼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상대방을 초대해 놓고 혼자 즐겨선 안 된다.
자신들만의 진영을 구축해 놓고 '대화도 토론도 없다, 내 생각은 이러니 따라 올 테면 오고 싫으면 관둬라'는 식으로 외면한다면 그것은 같은 당 소속이 아니다. 계속 이럴 바엔 차라리 분당하는 게 낫다는 홍준표 의원의 말에 공감한다. 정치인 모두가 더 이상 국민들에게 외면 당하기 전에.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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