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5도. 양수리 천변 심야 촬영이다. 스태프들은 전부 두터운 패딩 점퍼에 방한화, 털모자로 중무장했다. 밥차에서 배식 받은 밥을 먹는 스태프들의 식판에서 더운 김이 솟아오른다. 오늘의 촬영 분은 남녀 주인공이 눈 오는 밤 강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장면이다. 지난 밤부터 내리던 눈도 저녁식사 전에 그쳤다.
영하 15도 속의 강행군
눈을 뿌리는 강설기 기사가 인공눈 제조를 위해 기계를 시험 가동하고 있다. 오토바이가 달려야 할 좁은 천변 길은 눈으로 덮여 꽝꽝 얼었다. 조명팀과 제작팀이 급조한 나일론 빨랫줄로 오토바이 바퀴를 감는다. 일종의 스노우 체인이다. 의상 스태프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배우들의 속옷 안쪽에 보호대를 채우고 있다. 무술감독이 옆에서 꼼꼼히 점검한다.
드디어 조명 크레인이 오른다. 캄캄하던 천변 일대가 빛으로 은은한 달빛으로 물든다. 빛들은 눈 위에 반사되면서 드넓은 호수 위로 번져간다. 잠깐 그 풍경에 넋이 나간다. 꽝꽝 언 호수 위에는 낮에 누가 다녀갔는지 발자국이 어지럽다. 스태프들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촬영이 시작된다. 촬영팀이 촬영용 전동차 에 올라탄다. 강설기가 촬영 감독이 잡은 프레임 안으로 눈을 쏟아낼 준비를 하며 위치를 잡는다. 조명팀이 세부 조명을 위해 조명기를 옮긴다. 멋진 나뭇가지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강변에 쓰러진 커다란 나뭇가지를 조명기 앞으로 옮겨 놓는다.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에 강설기가 멈춘다. 추위로 엔진이 멈췄다. 연료를 공급하는 배관 어딘가에서 오일의 점도가 높아지면서 동맥경화처럼 막혀버렸다. 기계에 일가견이 있다는 스태프들이 모두 달라붙는다. 그러나 한번 멈춘 강설기는 쉽게 다시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 간다. 이대로 날이 밝으면 스태프의 모든 노력과 기재 비용들이 물거품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비상용 소형 강설기를 가동하기로 한다. 강설의 폭이 좁기 때문에 특수효과 팀원이 강설기를 들고 오토바이를 따라 뛰기로 했다. 특효 팀원이 몇 번 넘어지고, 오토바이가 몇 번 아슬아슬 곡예 운전을 하고, 그때마다 분장팀이 흐트러진 여주인공의 머리를 다시 정리한 끝에 첫 컷을 완성했다.
두 번째 컷 촬영 전에는 촬영용 전동차가 멈췄다. 배터리 구동 방식인 이 차도 추위에는 속수무책이다. 촬영부원이 전동차를 밀어 장비용 탑차 안으로 들어가 자식을 보듬듯이 보듬는다. 그 사이 이번에는 오토바이가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용도로 준비해 두었던 오토바이를 쓰기로 한다. 그러나 이 오토바이는 모양이 너무 다르다. 스태프들이 이번에는 오토바이에 달라붙어 개조를 시작한다. 30분 만에 오토바이는 원래 것과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변했다. 물론 안전용 나일론 끈도 다시 칭칭 감는다. 전동차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멈춰있으면 다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 스태프들이 돌아가며 휴식시간에도 전동차를 앞으로 뒤로 몰고 있다.
추위 녹이는 열정과 희열
시간이 갈수록 추위는 방한복을 뚫고 들어온다. 1시간에 5mm씩 정확한 간격으로 파고들어온 추위는 4 시간 정도면 살갗에 닿는다. 강설기에서 나오는 매서운 바람은 현장의 체감 온도를 5도는 내려놓는다. 그래도 스태프들은 한 컷, 한 컷 찍어나간다. 마지막 컷은 강설기가 필요 없었다. 여명 속으로 계절의 눈이 펑펑 내렸다.
밤샘 촬영을 끝낸 스태프들이 눈 속을 아이처럼 뛰어다니며 장비들을 정리한다. 마라톤의 중간에 느끼는 극단적인 희열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면, 이런 것을 슈팅 하이(Shooting high)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이 젊은 스태프들의 열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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