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이 전한 아이티 사진에 오른 손에 식칼을 든 흑인 남자는 식량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여차하면 누구라도 찌를 기세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살아남기 위해 상점으로 몰려가 식품을 약탈하고, 구호물자를 서로 받으려고 주먹과 망치를 마구 휘두른다. 가진 자들 역시 살기 위해 그들을 향해 총을 쏜다. 생존의 몸부림, 굶주림 앞에서는 법도 양심도 소용없다.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과 경계까지 무너뜨려 버린다. 자연의 재앙이 무서운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반드시 더 끔찍한 인간들의 재앙을 불러들인다.
▦지옥은 죽은 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일지 모른다. 아니면 미래 어느 날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자연의 재앙에 이은 인간들의 재앙으로 만든 생지옥 같은 세상.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 와,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국내 상영 중인 영화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은'나만의 생존'을 위해 서로 빼앗고, 마침내 인간의 몸에까지 입을 댄다. 더 이상 인간세상이기를 포기한다. 어떤 기적이나 구원이 없다면 마지막에 가서는 가장 잔인한 한 사람이 남고, 그가 죽으면 인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더>
▦<더 로드> 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건다. 아이를 해치려는 인간은 누구든 용서하지 않고, 아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과 물을 구하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않으려 한다. 아버지는 자신들만이 좋은 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이를 납치하려는 남자를 죽이고 나서"내 일은 널 지키는 거야. 하느님이 나한테 시킨 일이야. 너한테 손 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죽일 거야. 알아 들었니?"라고 하는 아버지에게 아이는 한참 있다가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인가요?" 더>
▦물론 그들은 좋은 사람이다. 지옥에서도 아이는 순수하고 착하며, 살인도 불사하지만 때론 아이의 간절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아버지 역시 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도둑을 용서하니까. 그렇다고 그들을 해치려 하고, 음식을 빼앗으려고 한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 폭도, 악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들 역시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처럼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에서는 선악의 구분조차 무의미하며, 신(神)도 살 수 없다. 아이티가 지금 그런 곳일지 모른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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