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4일은 미륵사석탑 사리장엄일괄 유물이 발견된 1주년 되는 날이었다. 미륵사는 지금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해발 430m) 남록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던 백제시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나 오랜 옛날 없어졌고 그 터만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1993년에 복원된 동편의 9층석탑(동탑)과 미륵사의 연륜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보물 제236호)가 남아있다. 아울러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건립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 미륵사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국보 제 11호였던 미륵사지석탑은 복원을 위해 해체되었고 이를 다시 복원하기 위한 가설건물이 마련되어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과 그의 부인이 미륵산에 있는 사자사에 행차하는 과정에 용화산 즉 미륵산 기슭의 못가에 이르러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 자리에 절을 세우기를 간청해서 창건한 것으로 부인은 신라의 선화공주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창건에 관한 내용보다 국보인 미륵사석탑(서탑)이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 탑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 역시 제일 클 뿐 아니라 특히 탑의 구조양식이 목조탑에서 석조탑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삼국시대 석탑중의 석탑으로 그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여러 층이 붕괴되기도 해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고자 시멘트로 응급처리 함으로써 붕괴는 막았지만 시멘트 탑인지 석탑인지 분간을 어렵게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하여금 해체와 복원공사를 맡게 하여 지난 2001년부터 시멘트를 제거하고 잔존한 탑의 부제를 하나하나 해체해 마지막으로 1층까지 온전하게 해체했다. 그러자 석탑의 중심기둥이 놓이는 곳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2009년 1월 14일 살을 에는 강추위 속에서 한 변의 길이 24.8cm, 깊이 27cm되는 사리공 내부조사에 들어갔다.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사리장엄구는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륵사탑의 사리항아리(舍利壺)를 비롯하여 함께 수습된 유물이 500여 점에 달했다.
엄청난 사리장엄유물 출토에 모두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사리봉안의 내력을 기록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봉안기의 내용을 통해 미륵사의 창건 이유와 시주한 사람은 물론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즉 백제 무왕 때인 639년 1월 29일에 사리를 봉안했고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귀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임이 밝혀졌다. 이로써 사찰의 건립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청한 것이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시주해서 건립된 것임이 명백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생겼다.
물론 해석하는 데 있어서 미륵사가 3개의 사찰이 병렬식으로 붙어 마련된 소위 3원식(三院式) 건물배치였기 때문에 중앙의 목탑과 동쪽에 마련되었던 석탑의 시주자는 각각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바로 단정하기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제부터 실체적인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따라야 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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