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낭만과 여유가 있던 시절엔 여야 정치인 간의 공방에 고사성어가 자주 등장했다. 고사성어는 직설적 표현보다 널리, 빠르게 전달되면서 오래 기억된다.
최근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와 박근혜 전 대표의 미생지신(尾生之信) 논쟁을 보면 고사성어 정치가 부활한 듯 하다. 미생지신은 춘추시대 미생이라는 사람이 애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퍼붓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물에 휩쓸려 죽었다는 중국 고사에서 비롯됐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간혹 신의가 깊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정 대표는 14일 전자의 해석을 내세워 약속론을 내세워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박 전 대표를 겨냥했다. 이에 박 전 대표가 18일 정 대표와 반대의 해석을 하면서 "미생은 죽었어도 귀감이 됐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 손가락질 받았다"고 맞받아쳤다.
지난 달 한나라당 세종시특위 위원들을 만난 정우택 충북지사가 '무신불립'(無信不立ㆍ 신의가 없으면 개인도 국가도 존립할 수 없다)을 빌어 세종시 수정 추진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친이계 백성운 의원은 '견리사의'(見利思義ㆍ눈 앞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한다)란 말을 인용해 충청권 이익보다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박근혜 전 대표는 당 대표 시절인 2005년 3월 '도광양회'(韜光養晦ㆍ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기른다)란 말을 쓰면서 독도 문제에 대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을 비판했다. 이에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임채정 의장은 "이번엔 '유소작위'(有所作爲ㆍ일이 생길 경우 적극 대처해야 한다)가 맞다"고 응수했다.
과거 정치인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표현할 때 고사성어를 많이 썼다. 문민정부 창업 공신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정권 출범 직후 재산공개 파문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토사구팽'(兎死狗烹ㆍ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이라고 토로한 것은 유명하다. 이어 김 전 의장과 같은 상황에 처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심경을 '격화소양(隔靴搔痒ㆍ신을 신은 채 바닥을 긁으면 소용이 없다)'에 빗댔다.
고사성어 정치의 달인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이다. 그는 정치적 고비 때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ㆍ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ㆍ1980년 정치활동 금지 때) '줄탁동기'(모든 일엔 때가 있다ㆍ1997년 대선 정국을 앞두고) '토사구팽'(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결별하며) 등의 고사성어로 심정을 표현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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