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희수는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의 동생 심봉원(沈逢源)의 손자다. 누가 봐도 혁혁한 양반가문의 후손이다. 그러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방탕한 소년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권세 있는 재상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심희수는 음식과 술을 마구 먹고 마셔댔다. 끌어내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 때 춤을 추던 기생 일타홍이 가만히 그에게 접근해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소실로 들여줄 것을 부탁했다. 심연원의 홀어머니는 집안이 가난한데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그녀는 심연원의 기상이 범상하지 않으니 자기가 한번 그를 감화시켜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애원했다.
허락을 받은 일타홍은 그날부터 기생을 그만두었다. 심희수를 서당에 보내고, 돌아오면 밤늦도록 함께 공부했다. 달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고, 호소하기도 했다. 홀어머니에게도 극진히 했다. 뿐만 아니라 양반집 규수를 골라 적실부인을 삼게 하고, 추호도 질투하지 않았다. 자기는 소실의 지위로 만족했다.
심희수는 열심히 공부해 1570년(선조 3)에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고, 2년 뒤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일타홍의 첫 번째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심희수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옥사에 재판관 정철(鄭澈)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보고 언관으로서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다가 삼척부사로 강등되었다. 제법 빳빳한 선비가 된 것이다.
심희수가 이조 낭관(郎官) 벼슬을 할 때의 일이다.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고향 금산(錦山)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그곳의 원을 자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왕도 그의 원을 들어주었다. 일타홍의 부모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나 일타홍은 병이 들었다. 소원이 성취되니 허탈감이 사무쳐 병 아닌 병이 된 것이다. 일타홍은 내아(內衙)에서 심희수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었다. 오직 부탁은 부디 자기를 잊고 시신은 선산 발치에 묻어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후 심희수는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서 의주로 파천하는 선조를 호종(扈從)했다. 일타홍이 중국어를 공부하게 해 도승지로 발탁된 것이다. 서울로 돌아와 대제학에 올라 문형(文衡)을 잡았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재상이 된 것이다.
그는 선조와 광해군 두 임금을 모시면서 용기 있게 옳은 말을 잘 해 큰 공로를 남겼다. 그리고 1622년(광해군 14)에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적으로 도와야 한다. 퇴계 선생은 홀어머니인 춘천박씨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석학이 되었고, 한석봉은 떡장수 홀어머니의 뒷바라지로 명필이 되었으며, 오윤겸은 아버지 오희문의 염원에 가까운 후원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심희수와 기생 일타홍의 일화는 우리에게 짜릿한 교훈을 던져준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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