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건 이후의 정국은 그야말로 안개정국이었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으니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 신군부가 나타나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를 구속하고는 박정희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며 12.12쿠데타로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고서 유신체제를 연장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면 민주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서울의 봄'이라고도 하는 이 시기를 곧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정세는 언제나 유동적이고, 정세에 대한 견해 또한 비관론과 낙관론이 있게 마련이다. 박정희 일인독재를 제도화해 놓은 유신독재체제에서 박정희가 죽은 이상 민주화가 대세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민주세력의 부적절한 대응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민주세력의 부적절한 대응으로는 우선 박정희의 죽음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대응을 꼽을 수 있다. 박정희가 죽은 후 신군부가 김재규를 구속하고 박정희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려고 할 때 민주세력은 이에 제동을 걸었어야 한다.
김재규 구속과 국장을 현실적으로 중단시키지 못하더라도 독재자 박정희는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제거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자업자득임을 밝히면서 김재규 구명운동을 적극 전개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하나는 1980년 1월 김근태의 모친상 때 상가에서 당대의 문인 조모 씨 등과 담소하는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내가 박정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장사진을 이룬 국민의 추모행렬은 옳지도 않거니와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말했더니, 조 씨는 나더러 너무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며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인 만큼 국민의 추모행렬은 인간적인 모습의 하나라고 옹호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몇 년 전 10.26사건 당시 서울 인근 육군 모부대에서 중령으로 근무하다 후일 중장으로 퇴역한 김모 씨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직후에는 자기 주변에 조문하려는 사람이 전혀 없다시피 했고 자신도 조문할 생각이 없었는데 며칠 동안 매스컴이 박 대통령을 추모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추모행렬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 조문하지 않았다가는 큰일나겠구나 싶어 조문을 했다고 했다.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인 군부에서조차 이러했거늘 일반 사회에서는 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만약 민주세력이 박정희의 죽음을 자업자득 내지 민주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몰아붙였더라면 국민들의 추모행렬은 크게 줄었을 거고 신군부의 정권장악음모도 탄력을 잃었을 것이다.
5.17쿠데타 당시 신군부의 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또 이런 말을 덧붙였다. '10.26사건 후 세 김 씨가 단합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막는 데 힘을 합했다면 군부가 감히 나서지 못했을' 거라고.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신군부의 등장을 막는 데 우선 주력해야 할 양 김씨가 자기들끼리 서로 견제하기에 급급했던 것은 민주화를 못 이룬 중대한 요인임을 시사한다.
또 한 가지 민주세력의 부적절한 대응은 투쟁파와 비투쟁파로 나뉘어 탁상공론을 벌인 일이다. 투쟁파는 독재자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유신독재체제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신군부의 집권연장 음모에 맞서 민주화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비투쟁파는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권력내부의 친위쿠데타에 불과할 뿐이어서 박정희의 죽음으로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닌 만큼 투쟁에 떨쳐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이 논쟁이 후일 학림, 무림 논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대립은 김재규 구명운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투쟁파는 독재자 박정희를 제거한 김재규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섬으로써 김재규를 처단하는 것을 통해 박정희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려 하는 신군부를 압박해야 한다고 보았고, 비투쟁파는 불과 며칠 전까지 민주세력 탄압의 총본산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이 유신독재의 연장을 위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인데 왜 우리가 그의 구명에 나서야 하느냐는 거였다.
신군부가 결코 만만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민주세력의 자세가 이러했으니 신군부의 등장을 막아내지 못한 상당한 책임이 민주세력에게 있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민주세력이 취한 구체적 행위들을 보면 이것은 더욱더 확연해진다. 결국 모든 일은 네 탓이기보다 내(우리) 탓임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이것이 내가 출소했을 때의 대체적 상황이다. 특히 'YWCA위장결혼식사건'으로 된서리를 맞아 기가 죽어 있竪?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죽었는데 이를 계기로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많은 동지들을 만나 당시의 정세와 투쟁 방향을 논의했다.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조성우, 이명준, 이신범, 심재권 등과 자주 만나 민주화투쟁을 함께 해나갔다.
그런데 내가 아주 믿었던 서울대 후배들인 김병곤, 박석운, 이범영, 백계문 등은 신중파가 돼 있어 설득에 힘이 들었다. 특히 그 당시 조성우의 역할이 아주 컸고 또 인상적이었다. 그는 정세판단이 빠르고 붙임성까지 있어 재야원로로부터 젊은이까지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통팔달이었다.
그런데 나는 출소하자마자 재야세력의 구심이라 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조직국장을 맡아 국민연합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밝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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