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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병원에서 새해 첫날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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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병원에서 새해 첫날을 맞다

입력
2010.01.16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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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을 병원에서 보냈다. 응급실에는 침대가 모자랄 정도로 환자들이 넘쳤다. 스키를 타다 팔이 부러진 여자, 술 먹다 싸워서 눈이 찢어진 청년, 고열에 시달리는 아기 등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다. 만약 액땜도 복이라면 제일 먼저 복을 챙긴 사람들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위로치고는 좀 억지스러워도 '모두 올해 여기보다 더 나쁜 곳에는 가지 않을 거예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고층 대형 병원 건물을 가득 채우고 있을 다른 환자들을 생각하니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갑작스런 사고이든 지긋지긋한 지병이든 어쨌든 싸우고 견디면서 이곳에서 새해를 맞았을 환자와 가족들을 생각해 봤다. 병원 로비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별이며 전등이며 반짝이는 어떤 장식물도 달려있지 않았다. 대신 환자와 가족들이 직접 쓴 희망 카드가 넘치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족의 건강과 평온을 기도하는 노모, 자식의 대학입학과 취업을 바라는 주부, 닌텐도를 꼭 갖게 해달라는 꼬마 등. 그저 아무 탈 없기를 바라는 일상의 소망에서부터 역시 병원이다 보니 간절하고 뜨거운 소원들도 많았다.

한 아이가 삐뚤삐뚤 글씨로 적은 카드에는 '형아 꼭 낳게 해주세요' 라고 쓰여 있었다. 틀리기는 했지만 연필을 꾹꾹 눌러 쓰며 진심을 담았을 동생의 얼굴이 그려졌다. 어느 젊은 부부가 쓴 편지도 퍽 애틋했다.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는 100일 된 아가에게 꼭 같이 집에 가자고 씩씩하게 말하는데, 엄마 품에서 떨어져 홀로 세상과의 첫 전투를 치르는 아가와 유리문 밖에서 숨죽여 지켜 불 수 밖에 없는 부부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물론 환자 본인이 제일 힘들겠지만 옆에서 함께 기다리며 기도하는 가족들의 희망이 그 크리스마스트리를 빛내고 있는 듯 했다.

사실 그들의 소원이란 그걸 들어주지 못하는 신이 야속할 정도로 그저 소소한 것들이었다. 평범하게 하루하루 보내는 행복을 되돌려 받고 싶을 뿐이었다. 어느 아버지가 단정한 필체로 빼곡하게 쓴 편지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우리 아이 씹을 수 있게… 걸을 수 있게 해주세요…' 아마도 그 아버지의 가슴에는 일년 내내 기적의 선물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첫 날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노라니 문득 사춘기 시절 삶의 허무를 느낀다고 투덜대자 엄마가 일부러 남대문시장에 데려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남대문시장에 처음 가본 나는 옷 파는 아저씨의 엄청난 목청과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곳의 활기찬 열기를 보여주며 엄마는 삶이 지루해질 때면 이 에너지를 떠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병원에서 새삼 삶의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려니 건강한 이의 마음보가 스스로도 얄밉게 느껴져 뜨끔했다. 최선을 다해 병과 그것을 준 냉정한 운명과 싸우는 환자와 가족들의 분투는 조용하고 진솔한 감동을 주고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들의 그 용기와 사랑을 한 수 배워가고 싶었다.

응급실 앞에는 시급한 뇌졸중 환자를 위한 안내문이 따로 붙어있었다. '시간이 생명입니다.' 별 말 아니지만 하나의 경구로 다가왔다. 그렇다. 시간은 돈이 아니었다. 시간은 꿈이고, 아픔이고, 사랑이고 그리고 생명이 가진 모든 것이었다. 올해, 나의 평범한 시간이 곧 기적 같은 생명임을 잊지 않으며 다시 또 시작해 보려 한다.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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