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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쓸쓸해서 머나먼' "침묵의 시간 깨고, 다른 詩밭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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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쓸쓸해서 머나먼' "침묵의 시간 깨고, 다른 詩밭으로 가고 싶다"

입력
2010.01.16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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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발행ㆍ108쪽ㆍ7,000원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에서)

최승자(58) 시인이 <연인들> (1999) 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여섯 번째 시집이다.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심신쇠약을 앓고 있는 시인의 새 시집엔 80년대를 풍미했던 그의 시의 격렬한 염세와 절망 대신, 정적인 사유와 관조를 담은 70편의 시가 실렸다.

현재 포항의료원에 입원 중인 최씨는 지난해 8월말 육필 시 원고 60여편을 우편으로 출판사에 보냈고, 전화 구술과 팩스로 신작 시를 보탰다. 우울증 등으로 고통 받던 그는 90년대 들어 점성학 등 상징체계 공부로 정신적 출구를 찾고자 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간간이 번역서를 내고 2006년 일시적으로 10여편의 시를 발표했을 뿐, 2000년대에는 병원을 드나들며 내내 침묵해왔다.

이번 시집의 전반에 걸친 주제는 시간이다. '시간은 국가들이었고/ 제도들이었고 도덕들이었고/ 한마디로 가치관들'('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에서)로 보는 시인에게 시간은 문명의 본질이다. 이런 인식은 '이 세상에 시계처럼 고단한 것은 없다/ 인간들 또한 그러하다/ 아침이오, 저녁이오,/ 또각또각 참으로 고단하다'('맑은 소프라노의'에서)는 성찰로 이어져, 문명에 대한 대결의식을 순화된 형태로나마 다시금 확인시킨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시간은 그에게 덧없음을 상기시킨다. '시간 속에서 시간의 앞뒤에서/ 흘러가지도 않았고 다만 주저앉아 있었을 뿐/ 日月도 歷史도 다만 시간 속에서// 나는 다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을 뿐'('보따리장수의 달'에서). 병을 앓느라 속절없이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 그는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세월의 학교에서'에서)라고 걱정도 하고, '먼 꿈 하나/ 댕그라니/ 꿈에도 비에 젖지 못할' '부엌 창문턱의 작은 아이비 화분'('그녀는 사프란으로 떠났다'에서)이란 비유로 자기연민을 비치기도 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시구로 기억되는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1981)을 비롯, 암울한 시대에 대한 통렬한 야유와 처절한 자기모멸로 젊은 독자들을 열광시켰던 시인 최승자를 기억한다면, 그의 이번 시집은 낯설 법도 하다. 이에 시인은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면서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에서)며 새로운 시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답한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 길이 있었음을/ 뛰고 뛰던 길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나는 기억하고 있다'에서)며 다시금 의욕을 불태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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