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의 현장은 어디일까.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은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오욕의 역사 현장으로 보존돼 있지만, 정작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체결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당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병합조약을 체결했으나 지금까지 이 통감관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작업은 전무했다.
민간 문화재연구가인 이순우(48)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최근 출간한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하늘재 발행)에서 통감관저의 위치를 현재 서울 중구 예장동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와 서울유스호스텔(옛 안기부 남산청사) 사이의 소공원이라고 추정했다. 통감관저,>
그는 이 소공원으로 통하는 진입로와 그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은행나무에 주목했다. 1911년 1월 1일 일본에서 발행된 '사진화보그래픽'의 특별증간호 '일본지조선(日本之朝鮮)'에는 남산 통감관저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진 속의 관저 진입로가 현재의 공원 진입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사진을 비롯해 일제시대의 여러 자료에는 총독관저 앞에 큰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현재도 공원 진입로 입구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돼있는 이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소장은 이 건물이 1939년까지 총독관저로 사용되다가 이후 해방 때까지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사용된 사실, 해방 후에는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쓰이다가 철거된 사실을도 지도, 문헌, 사진자료 등을 통해 고증했다.
현재 이 공원에는 벤치만 몇 개 들어서 있을 뿐 이곳이 옛 통감관저 자리였음을 알리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소장은 "5ㆍ16군사정권 이래 이 일대가 옛 중앙정보부가 관할하는 구역으로 편입됨에 따라 접근이 거의 차단되었고 총독관저라는 존재는 서서히 지워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들춰내는 일이 그리 달가울 리 없겠지만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며 이 땅을 지배했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표지석 하나 정도는 마땅히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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