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와 핸드폰은 같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 하지만 그 둘은 같다. 문명의 이기이며 대중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것도 추상화 작업을 거치면 비슷해지거나 같아진다. 그런 점에서 추상화 작업은 매직에 다름아니다.
정부 정책을 추상화시키는 경우를 보면 그 매직을 실감할 수 있다. 종부세 반대와 서민경제 살리기는 애초에 맞닿을 수 없는 정 반대의 정책 사안이다. 그러나 추상화 매직을 거치면 둘은 형제 정책이 될 수도 있다. 종부세는 누진 방식으로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다. 누진적이기 때문에 '세금 폭탄'을 매기는 불평등 셈법이다. 그러므로 종부세 반대는 평등을 옹호하는 일이 된다. 서민경제 살리기는 소외받는 서민이 골고루 경제 혜택을 받게 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른바 평등 정책이며 슬로건이다. 종부세 반대와 서민경제 살리기는 이처럼 추상화 사다리를 타며 평등을 고리로 만난다.
추상화라는 매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종부세 반대와 서민경제 살리기를 평등을 고리로 엮으면 정책 대상인 대중을 한 울타리 안에 두는 일이 쉬워진다. 정책 혜택을 평등하게 받는 경제공동체 가족임을 강조하는 일이 쉬워진다. 종부세를 찬성하는 쪽을 가족을 해치는 패륜, 서민경제 살리기를 제스처라 말하면 인정머리 없는 헐뜯기로 모는 일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추상화의 매직 탓에 어느 틈엔가 국가가 가족국가(家國)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먹을거리를 고민하는 가장이 있고, 가장을 떠받치는 친척이 있고, 가장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식구가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체계 잡힌 가족이 그렇듯 모두가 따라야 하는 가국 교훈을 내세운다. '가화만사성'.
방송에 가해지는 사회적 담론에서 그 징후가 뚜렷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일방적 국가 홍보물 같다며 심의 대상이 되었던 KBS의 '영산강 희망선포식'에 문제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가국의 새로운 먹을거리를 발굴, 노래함은 칭송받아 마땅한 일일 뿐이라는 속내를 내비친 셈이다.
작년 연말에 방송한 MBC의 '4대강과 민생예산'를 심의하면서는 표정을 바꾸었다. 4대강 정책 탓에 민생예산이 손해 본다는 결론을 내린 그 프로그램엔 문제있음을 의결했다. 공정성, 객관성 조항을 문제 삼아 곧 제작진을 출석시켜 의견을 청취할 예정이라 한다. 편파적 홍보로 일관하더라도 가국 공동체 이익을 위한 경우는 문제없음, 정당한 비판이라도 가국을 해치려 한 경우는 처벌. 가화만사성이기 때문에.
추상화 사다리를 타고 국가가 가국으로, 국가 정책은 가국공동체 이익을 위한 것으로 바뀌면서 사회적 담론은 단순해졌다. 가국에 도움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단순한 담론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떠받들고 있다. 위원회는 패륜을 가려내는 집안 아저씨 꼴을 자처하고 나섰다. 집안 허물을 떠든 쪽엔 각을 세우지만 큰 허물이라도 집안 일이라며 눈감는 쪽엔 칭송의 낯빛을 한다. 참으로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아저씨 꼴을 하고 있다.
불행한 일이다. 애초 국가기구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방송 심의를 하는 일에 언론자유 침해라는 위헌 지적이 있었던 터다. 그 지적을 비켜가는 조심성이라도 있어야 했지만 위헌성에도 아랑곳않으며 불공정한 아저씨 기개를 뽐내고 있다. 스스로 우리 살림살이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위원회에 불행이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을 전할까.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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