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랑스러운 영화가 최근 충무로에 또 있었을까. 웃음과 따스함으로 가슴을 넉넉하게 만드는 '페어 러브'는 한국영화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시작은 어둡다. 친구의 죽음을 목전에 둔 50줄 중년 사내들의 표정이 무겁다. 노총각이라는 수식조차 버거운 형만(안성기)은 전 재산 8,000만원을 빌려가고 갚지도 않은, 그리고 간암으로 먼 길을 떠나려는 친구가 한없이 밉다. "내 딸을 부탁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친구에게 형만은 몸을 떨며 말한다. "이 자식은 항상 이런 식이야."
형만은 천성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의 딸 남은(이하나)을 돌본다. 그런데 남은의 눈빛과 말투가 심상치 않다. "아저씨 예뻐요"로 시작해 "내 마음 다 알죠?"라며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뭘 다시 시작할 나이도 아니고"라며 멈칫하던 형만도 결국 마음을 연다. 그가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던지는 말. "누구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고지식한 숙맥 아저씨의 대표 선수답다.
주변의 반대는 예상대로다. "저, 여자 생겼어요. 학교 다녀요"라는 형만의 깜짝 고백에 형수는 무심하게 "어느 학교 선생님이세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여자가 대학생임을 깨닫자 바로 주기도문을 왼다. 친구들은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형은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대경실색 한다. 건실한 처녀 (노)총각임에도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벽은 높기만 하다.
하지만 장애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형만과 남은은 '오빠'라는 곰살 맞은 단어를 매개로 사랑을 키워간다. 그리고 문득 파국의 위기를 맞게 된다.
대사들이 매혹적이다. 되새김질 할수록 맛이 우러난다. 구형 필름 카메라와 턴테이블에 올려진 LP판이 은근한 사랑의 기운을 전한다. 오랜 시간 공들여 찾은 듯한 서울의 뒷골목 등은 20세기의 정서를 품으며 흔치 않은 사랑을 다독인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포근해진다. 중년의 사랑을 이토록 정갈하며 세밀하게 묘사한 영화는 당분간 만나기 어려울 듯하다. 강렬하진 않지만 쉬 잊혀지지 않을 영화다. 감독 신연식. 1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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