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전화 외면하며 쌓은 실적 "능력 인정받아도 속은 숯덩이"
"폐렴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일단 입원부터 시키세요."
의사의 책망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입원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네 살배기 딸아이를 꼭 안아 줬다. "애 아픈 거 보이지도 않았냐"며 혀를 차는 친정어머니에게 15년차 출판 디자이너 최연우(가명·37)씨는 아무 변명도 못 했다.
워킹 맘의 일상은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사회가 자신들을 그렇게 몰아가는 것 같단다.
'워킹 맘=슈퍼 우먼' 고정관념
최씨는 딸이 며칠 전 감기 증상을 보여 집에 있던 약을 먹였다. 열이 내리길래 금방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솔직히 근래 계속된 야근과 주말 근무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신경도 예민해지고 잠도 쏟아졌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엔 너무 힘들었다.
며칠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어머니가 병원에 가 보자며 최씨를 채근했다. 결국 폐렴 진단이 나왔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병원에 뛰어가야 했나 봐요. 너무 속상해서 울고 싶었죠. 하지만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모두들 나무라기만 했죠."
워킹 맘도 사람이다. 직장일과 가정일에 치여 때론 아이보다 더 힘들고 아플 때가 있다. 하지만 사회엔 워킹 맘은 당연히 슈퍼 우먼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아이가 아프면 식구들부터 엄마를 원망하고, 교사조차 아이가 숙제를 안 해오면 엄마에게 전화한다. 두 아이를 키우며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는 조연희(가명·33)씨는 "상담만 한 달에 2번, 행사까지 생기면 월차만으로 해결 안 될 만큼 유치원에서 엄마를 자주 찾는다"고 한숨지었다.
재충전 시간은 꿈도 못 꾸니 피곤은 쌓여 가고 행복은 요원해진다. 유아 용품 업체 보령메디앙스 산하 보령모자생활과학연구소와 서울대 연구팀은 최근 영ㆍ유아를 둔 엄마 3,070명을 대상으로 3만2,268가지 정서 경험을 분석했다. 워킹 맘이 전업 주부보다 불행을 느끼는 정도가 컸다.
말 못할 소외감에 '끙끙'
여자끼리라도 이해해 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던 김소영(가명·32)씨는 "정식 연구원으로 자리잡으려면 정시 퇴근해서야 되겠나, 아이보다 일에 올 인해라"는 상사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상사 역시 워킹 맘이다. 김씨는 "여자 상사들은 '나도 다 그랬다'고 매정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라고 털어놨다.
공공 기관 운영팀에서 일하는 곽현실(37)씨는 "아이가 아파 일찍 퇴근해야 하는 워킹 맘 동료를 대신해 일을 분담하는데 한 골드 미스 직원이 불만을 터뜨렸다"며 "자신도 머잖아 겪을 일인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야근이나 회식 참여가 자유로운 골드 미스를 워킹 맘보다 능력 있다고 여기면 워킹 맘들은 속이 터진다.
사내 인간 관계에 신경 쓸 여력도 없다. 홍보 회사에 다니는 이영희(가명·33)씨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올 시간에 맞추려면 추가 업무도 퇴근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며 "동료와 티 타임을 가질 여유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사내 정보에도 소외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유능할수록 더 불행한 현실
"지방 출장 때문에 전날 새벽에 집을 나서 한밤중에 들어왔다가 다시 다음날 새벽에 출근했던 때였어요.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지난해 유치원에서 6살짜리 딸이 옷에 오줌을 쌌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장산희(33·가명)씨. 공공 기관 홍보팀에서 일하는 장씨는 최근 직장의 실적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2,000여명의 직원 가운데 50명 이내에 든 것이다.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고도 기쁘지만은 않다. 지방 출장 마다 않고, 회의 때 아이 전화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받지 않으며 쌓은 실적이다.
장씨는 "남자가 아이 전화를 받거나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면 가정적이라고 칭찬하지만 여자에겐 여자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결과가 좋을수록 말이 나올까 더 조심할 수밖에 없어요"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제학자들은 총 6개 기관이 최근 30여 년 동안 선진국 남녀 130만명의 행복감을 조사한 통계 결과를 종합 분석한 보고서를 내놨다.
여성의 소득이나 교육 수준, 직업 같은 삶의 객관적 지표는 눈에 띄게 향상됐지만 스스로 느끼는 행복감은 계속 감소해 왔다.
한국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이윤실(48) 한국원자력의학원 책임연구원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조찬이나 저녁 모임이 많아져 더 힘들어요. 업무 외 시간인 이런 모임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니 빠질 수가 없죠"라고 토로했다.
이 연구원은 대규모 연구 과제의 책임자다. 저녁 문화에 빠진 불이익이 자칫 함께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미칠까도 걱정된다. 육아휴직은 당연히 못썼다. 그는 "3개월 이상 쉬면 연구 과제 책임을 맡지 못하게 돼 있어요"라고 귀띔했다.
■ 한직으로만 도는 '마미 트랙' 아시나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워킹 맘.
이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쉽고 하찮은 일만 맡아 한직을 도는 워킹 맘들의 선택을 가리켜 마미 트랙(mommy track)이라는 말이 서양에서 생겨났다.
직장에서 오직 일과 성공만을 위해 남성이 추구하는 패스트 트랙(fast track)과 비교돼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선택이 아닌 강요라는 것이 이들 워킹 맘들의 주장이다.
국내 대기업 계열의 광고 회사에 5년째 근무하고 있는 최지연(가명ㆍ31)씨.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했고, 영어와 스페인어까지 능통한 최씨는 입사 초부터 아이디어 뱅크로 불리며 회사의 중요 프로젝트를 선점했다.
하지만 2년 전 결혼과 동시에 최씨의 직장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일의 특성상 야근이 잦은 최씨는 남편과 종종 갈등을 겪어 왔고, 임신까지 하면서 도저히 예전의 업무를 할 수 없었다.
최씨는 "2년 동안 함께 일한 상사와 동료들에게 사정을 얘기했지만 오히려 배려를 해 준다며 인턴이나 신입들이 주로 하는 자료 수집과 번역만 맡겼다"며 "일에 대한 욕심이 크지만 가정일을 동시에 챙기려면 이런 수모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워킹 맘들은 회사 내에서 아기 엄마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한직으로만 돈다고 입을 모은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마지막 몸부림으로 버티고 있지만 같이 입사한 남자 동기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 가도를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일과 가정을 둘 다 포기하고 싶은 심리적 공황 상태까지 온다고 주장한다.
최씨는 "요즘 입사하는 능력 있는 여성 후배들에게 이 길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결혼하지 말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다"며 "이렇게까지 해서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건지 회의감 속에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황현숙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마미 트랙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이유 자체가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함께 돌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이라며 "능력 있는 여성들의 전문성을 키워 주는 것이 결국 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환기자 bluebird@hk.co.kr
■ 전문가 조언 "좋은 엄마 압박감 버리고 당당히 소통하라"
'똑똑하고 당당해져라.'
워킹 맘에게 전문가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육아 관련된 사회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한 도움을 청할 때 스스로 위축되지 말라는 것.
말 없이 혼자 육아와 가사를 모두 감당해 냈던 과거의 어머니상이 아니라 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새로운 엄마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많은 워킹 맘이 행복은커녕 움츠러들며 혼자 끙끙 앓다 심하면 우울증까지 얻는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는 "워킹 맘의 우울증은 항우울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고립되지 말고 자주 다른 엄마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사회가 부여하는 좋은 엄마 역할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을 돌보는 여유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한경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워킹 맘이 신체적 피로나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결과"라며 "좋은 엄마 역할에 대한 압박감이 자칫 자녀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가 육아 정책을 내놓기에 앞서 먼저 현실적 과학적 분석부터 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신 교수는 "예를 들어 육아휴직 사용 기한을 (3세까지로) 제한하는 제도는 발달과학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정 편의적 발상"이라며 "실제 워킹 맘과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만들어야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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