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면 우리 몸은 저절로 온기를 찾아 든다. 밖으로 나가기 보다 따뜻한 집안에 머물고 싶다. 추위에는 역시 집이 최고다.
그러나 도시 아파트의 온기에는 텁텁함이 있다. 따뜻하기는 하나 썩 상쾌하지는 않다. 경북 안동시 임하호 부근 숲 속의 지례예술촌을 찾은 것은 군불 때는 온돌에서 몸을 녹이며 혹한을 쫓고 싶어서였다. 추위를 물리치되 자연과도 만나고 싶었다.
첩첩산중 호숫가의 외딴 한옥.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문화와 자연을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렀을 테지만 한파와 폭설이 몰아친 이 겨울 찾는 이 없는 그곳에는 쓸쓸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도 날씨지만, 이곳의 낭만적 분위기를 잊지 못해 한파에도 굳이 오겠다는 이들에게 눈이 아직 쌓여 있으니 날 풀리면 그때 오라는 주인의 당부가 있었던 것이다.
안동 시내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으로 가다 수곡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지례예술촌이 나온다. 앞에는 호수, 뒤에는 산이 둘러친 이곳은 부근에 마을이나 집이 전혀 없는 심심산골이다.
건물 10동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로, 임하댐 건설 공사가 본격화한 1988년 수몰예정지에서 산 위로 옮겨 복원했다.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663년 지은 것으로 알려진 지촌 김방걸 선생의 종택이다.
지촌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세속의 영예에 회의를 품고 안빈낙도를 구하기 위해 이곳 깊은 산으로 찾아 들었다. 현재 예술촌을 운영하는 김원길(68)씨는 그의 13대 후손이다.
조용한 곳에서 마음껏 글 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며 만든 예술촌이지만 글 쓰지 않는 일반인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지례예술촌에는 군불을 때면서 난방 하는 방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한지로 도배된 작은 방에 들어섰다. 온돌의 화력을 입증하듯 방 바닥이 새까맣다. 창호지 바른 작은 창을 열자 임하호가 바로 앞이다.
늦은 저녁 김원길씨가 건물 밖 아궁이에서 잔솔 가지로 불을 지핀다. 수그러들던 불꽃이 다시 일어났다. 잔솔과 달리 굵은 장작은 천천히 자신을 태웠다.
흔히 군불 때는 방은 일순간 뜨거워졌다가 금방 식는데 이 방은 그렇지 않았다. 김씨는 "구들에 진흙을 두껍게 깔면 온기가 오래 간다"며 "방이 금방 더워졌다가 식는 것은 깔린 진흙이 얇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뜨뜻한 방에서 밤중에 홀로 할 수 있는 것은 상념에 잠기거나 책을 읽거나 잠에 드는 것이다. 요 위에 앉아 책을 폈지만 글이 읽어지지 않는다. 대신 '쏴~'하는 바람 소리가 쉬지 않고 울린다.
물과 나무가 합창이라도 하듯 그 소리는 호수에서도, 산에서도 들렸다. 가끔 '휭~'하는 소리로 바뀌면 그 때는 영락없이 나무 대문이 삐걱거렸다. 등을 끈 뒤 잠시 창을 열었더니 불빛 하나 없는 칠흑 세상이다. 고요와 적막의 밤.
번잡한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절대고독 속에서 잠이 들었는데 온돌 바닥의 뜨거운 열기를 몸으로 받아서인지 아침이 상쾌했다.
집 앞 호수와 산길을 산책했더니 마음 속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매서운 추위도 한동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지러운 마음도 정리되는 것 같았다. 지례예술촌 (054)822-2590
■ 여행수첩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빠져 나와 34번 국도를 타고 들어간다. 대중교통편은 여의치 않다.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에 승용차로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군불 때는 방과 일반 보일러 방은 요금이 다르므로 미리 알아보는 게 좋다.
▦1년에 13회 제사를 지낸다. 제사 일에 맞춰 가면 제사를 볼 수 있다. 다른 문화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무료할 수 있다. 아이를 동반할 경우 놀잇감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 가족끼리 오순도순… 겨울철 한옥체험의 색다른 멋
한옥 체험은 주로 여름에 한다. 대청에 앉아 시원한 바람 맞으며 더위를 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당이나 마을 앞 개울에서 놀기도 좋다. 겨울이 되면 스키, 스케이팅 등을 제외한 야외활동이 대부분 위축되듯 한옥 체험 역시 여름에 비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름의 멋은 있다.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뜨뜻한 방바닥에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다. 꽁꽁 언 마을 개울에서 썰매를 타는 등 민속놀이도 해볼 수 있다. 한옥이라고 모두 군불을 때는 것은 아니다. 편리함 때문에 보일러 난방 하는 곳이 적지 않다.
한옥은 여러 곳에서 체험할 수 있다. 안동 하회마을, 순천 낙안읍성민속마을(061-749-3347), 아산 외암리민속마을(041-540-2654), 경주 양동민속마을(054-779-6105), 제주 성읍민속마을(064-787-1179), 전주 한옥마을(063-282-1330) 등이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고택 등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마을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안동의 수애당(054-822-6661)과 농암종택(054-843-1202), 청송의 송소고택(054-873-0234) 등은 한옥 체험으로 이미 이름을 떨친 곳이다. 가옥의 형태, 프로그램, 요금 등은 미리 알아보아야 한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 눈내린 하회마을도 볼거리
안동을 대표하는 명소는 하회마을이다.
지례예술촌은 안동의 동쪽에, 하회마을은 서쪽에 각각 위치해 있어 거리가 멀지만 안동에 갔다면 꼭 한번 들를 곳이다. 풍산 류씨가 600여 년 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 민속마을로 기와집과 초가가 잘 보전돼 있다.
하회는 최근 마을 출입구를 1㎞ 앞으로 당겼다. 그 거리만큼을 버스를 타거나 걸어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 찬 바람을 견딜 수 있다면 오른쪽으로 난 솔숲 길을 걸어 들어가는 것도 좋다.
눈이 깔린 작은 오솔길이 정겹다. 그 길 옆으로 흐르는 낙동강에서는 조용히 노닐던 철새들이 인적에 놀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회마을에는 아직도 눈이 많다. 마을 입구 논에는 흰 눈이 얹혔다. 솔숲에도, 모래밭에도, 기와지붕에도, 초가에도, 마을 뒤 화산에도 하얀 눈이 소복하다.
한겨울 농한기라 그런지 주민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부지런한 관광객들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지도와 카메라 들고 마을을 훑는다.
잔설이 깔린 고샅을 거닐며 그들은 과거를 여행하고 있다. 보물 306호 양진당, 보물 414호 충효당, 중요민속자료 84호 북촌댁 등이 이들이 주로 찾는 옛집이다.
바람이 차기는 하지만, 호젓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관광객 몰리는 한여름 보다 지금이 더 나을 수 있다. 마을의 기와집, 초가에서 민박하며 하룻밤 보내는 것도 좋은 추억이다.
가능하다면 화산 너머 병산서원에도 들러 보길 권한다.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다. 서원의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이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눈 때문에 들어가는 길이 좋지 않으니 하회마을 관리사무소(054-854-3669) 등에 반드시 사정을 물어보고 들어가야 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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