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 평화마을의 상징쯤으로 여겨지는 지리산 산골마을에 식인 멧돼지에 의해 잔혹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영화 '차우'의 기본 이야기이다. 식인 멧돼지는 영화 <괴물> 속의 괴물보다 다소 구체적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이 땅에서 멧돼지의 식인화는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식인 정도는 아니지만 멧돼지의 도심 출몰이 최근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멧돼지는 사람을 먹이로 삼지는 않지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람을 공격할 경우 치명적이다. 물론 멧돼지는 사살되었다. 괴물>
얼마 전까지 산에서 멧돼지의 출현은 곰이나 호랑이의 출현과 같은 긍정적인 관심을 받았다. 멧돼지의 출현은 망가졌던 자연이 회복되어 생명을 품을 만큼 성장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연쇄적으로 멧돼지의 서식은 멧돼지를 먹이로 삼는 포식성 맹수의 출현이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준다.
사람과의 갈등이 없는 비무장지대 및 민통선 지역의 멧돼지는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 12월에 실시한 비무장지대(DMZ) 생태조사에서 고라니의 개체수에 비해 멧돼지의 개체수가 적게 관찰된 것을 두고 이런저런 해석들이 나왔다. 도심의 멧돼지와 비무장지대의 멧돼지를 두고 발생하는 사람들의 태도 차이는 '하필이면 왜 그곳에서 태어났을까'정도의 우연성 때문이다.
잡식성이라 하지만 멧돼지는 나무뿌리와 같은 식물의 조직이나 도토리와 같은 나무 열매를 주로 먹는다. 농촌지역에서 옥수수 밭이나 채소 밭에 피해를 주는 일은 있지만 가축을 물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멧돼지에게 관심사는 오로지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먹이뿐이다. 식인 멧돼지가 아닌 멧돼지는 숲이건 도시건 그곳은 먹이를 찾는 장소일 뿐이다. 문제는 사람과 멧돼지의 터가 겹치는 곳이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멧돼지의 땅을 개간하여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으나 이를 알 리 없는 멧돼지는 그저 먹이를 찾기 위해 가까운 땅으로 들어올 수밖에.
물론 야생의 자연만으로는 멧돼지 먹이가 부족한 것은 멧돼지 집단의 빠른 성장 때문이기도 하다. 집단의 크기가 성장하는 데는 그들의 성장을 제어할 자연적인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멧돼지를 포식하는 늑대나 호랑이의 부재, 추위나 굶주림으로 인한 자연사를 줄인 포근한 겨울은 멧돼지 집단의 지속적인 성장을 초래했다.
새해 들어 말 그대로 혹한이 계속되고 있다. 아침마다 방송들은 겨울 추위를 두고 사람들의 엄살몰이를 해댄다. 겨울이 아니면 눈도 올 일이 없건만.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면서도 은근히 포근한 겨울을 다행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사람들의 일상을 꽁꽁 묶어버린 단 하룻밤의 폭설과 한파 앞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자연의 통제력을 실감하면서 적잖은 안도감을 느꼈다. 한편 꼼짝없이 고통으로 내몰리는 자연 속 뭇 생명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져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다만 자연사한 짐승들이 살아남은 짐승들에게 요긴한 먹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흰 눈 속에 펼쳐진 산야는 야생의 장대함을 드러내고 있다.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산자락들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갈비뼈마냥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만 같다. 눈을 머금어 윤기 나는 나무줄기들 사이로 호랑이의 번뜩이는 눈빛을 본 듯한 착각이 든다. 한 겨울 속의 이 산야는 진정 야생이 자연이다.
경인년 새해, 이 땅 어디인가에 있을 호랑이와 살아남은 멧돼지와 야생의 자연에서 위태한 생을 이어가야 할 뭇 생명들에게 평안함을 기원한다.
차윤정 생태전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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