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이라고 했다.
국내서 가장 볼만한 곳들은 이미 국립공원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다. '공인된 경승지'인 국립공원보다 아름다운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야말로 한국 자연의 정수들만 골라 모은 곳들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국립공원을 즐기는 방식이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 설악산은 설악동, 변산은 내소사, 치악산은 구룡지구 등 기본적인 대표 코스로만 몰려드는 것이다.
그리곤 국립공원이 간직하고 있는 다른 많은 아름다운 곳들은 찾아보지도 않고 사람만 많다며 투덜거리곤 서둘러 떠나버린다. 겉?기로 지나치기엔 국립공원이 갖고 있는 많은 매력들이 너무 아쉽다.
한국일보 프리는 2010년 기획으로 국립공원 속살을 찾는 여행을 제안한다. 일반인이 잘 몰랐던 국립공원의 다양한 루트와 숨겨진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자리다. 붐비지 않고 한적하게 거닐며 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는 곳들을 발굴해 소개할 계획이다.
한라산을 오르는 데는 성판악, 관음사, 어리목, 영실, 돈내코 등 5개 코스가 있다. 이중 15년간 문을 닫아걸었던 돈내코 코스가 최근 개방됐다.
돈내코 코스 일대는 제주의 희귀한 산림자원의 보고다. 아열대부터 난대, 온대, 고산지대 식물을 차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등산객의 발길에 많은 상처를 입었던 돈내코 코스는 인간의 출입을 막고 긴 시간 자연치유를 통해 땅심을 되찾았다.
이번에 개방된 돈내코 코스는 돈내코 입구 안내소-남벽 분기점-윗세오름 대피소까지 모두 9.1km. 왕복 7,8시간이 필요한 거리다.
한라의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는 돈내코에 설화가 예쁘게 피어날 날을 기다리다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나왔다. 서둘러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고는 돈내코로 향했다. 주차장에는 벌써 산행을 준비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버스를 대절한 어느 산악회 회원들은 단체로 힘찬 구령소리와 함께 몸을 풀었다. 돈내코 코스의 시작은 조금 으스스하다. 무덤가 한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등산로가 시작된다.
돈내코 코스 안내소를 지나 짧은 숲길을 벗어나면 긴 나무계단 길이다. 뒤돌아보니 서귀포시와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바다 위로 빨간 햇덩이가 솟아 힘차게 붉은 빛을 토해냈다.
겨울이지만 돈내코 코스의 시작점에는 다른 한라산 코스와 달리 눈이 없다. 계절로 친다면 가을 분위기다. 지리한 나무 계단 길을 지나고 다시 숲길이 이어진다. 푸르름이 여전한 숲에는 싱그러운 새소리가 가득했다.
숲속의 등산로는 오래된 옛 돌길로 이뤄졌다. 15년여 인간의 발길을 멀리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돌길이다. 수 년 전 내금강 옛길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반듯하지 않고 예스러운 돌길이 정겹게 발끝에 착착 감겨왔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돌로 만든 옛 안내판도 고졸한 멋이 있어 좋다. 마치 지난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다.
해발 800m 가량 높이에 이르렀을 즈음 발 밑에 흰 눈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라산의 겨울로 접어들었다. 계절의 타임머신 여행이다.
2.5km 가량 지났을 때 적송지대가 나타났다. 백두대간 큰 줄기에서 봤던 굵은 둥치의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무리를 짓고 있다. 발바닥에 살짝 깔렸던 눈도 이제 발자국이 깊숙이 찍힐 정도로 두툼해졌다. 이제부터는 깊은 겨울의 한라산이다.
등 뒤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길래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귀하게 열린 하늘이다. 거의 매일같이 눈구름을 이고 있던 한라산 산정이 모처럼 말갛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야겠다. 언제 또 구름이 몰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길고 긴 숲길을 벗어나자 저 멀리 백록담을 감싼 남벽이 보였다. 깊은 바다 빛의 시퍼런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먹먹한 하늘을 이고 있는 남벽은 웅장했다. 가파른 경사로 시커먼 맨 살을 드러낸 남벽은 깊은 주름의 틈바구니에만 희끗희끗 잔설을 이고 있을 뿐이다.
남벽을 정면에 두고 장대한 설원을 걸어 올랐다. 봄이면 한라산 제일의 진달래, 철쭉의 향연이 펼쳐진다는 곳이다. 모든 걸 눈이 덮었고 그 순백의 아름다움에 눈이 시렸다. 등산로를 알리는 높은 깃대엔 서리꽃이 두툼하게 달라붙었다.
남벽통제소의 전망대를 지나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향했다. 방아오름샘까지 20분,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1시간 거리다.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 방아오름샘에 도착했다. 얼음 둥둥 떠있는 샘물을 한바가지 떠서 목을 축였다. 그간 산행의 피로와 갈증이 한번에 풀어낼 정도로 맑고 시원했다. 한라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샘물이니 국내서 가장 높은 샘물이다.
윗세오름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영실이나 어리목으로 내려갈까, 아니면 돈내코로 도로 내려갈까 고민이 시작됐다. 뒤를 돌아보니 바다가 열렸다. 서귀포시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얇아지면서 창대한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산정에서 새하얀 설원 너머로 바라본 바다였다. 서귀포시 앞바다에 앙증맞게 떠있는 섬들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손짓하는 게 아닌가. 미련 없이 다시 돈내코로 향했다.
남벽통제소 앞 전망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벽을 가장 가까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공간이다. 배낭에 넣어 온 차가워진 빵을 씹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절벽의 사이사이 흰눈이 쌓인 거친 틈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창처럼 날카로운 바위의 끄트머리에도 하얀 서리가 내려 앉았다.
땀이 식기 전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산 저편에서 구름이 치고 올라왔다. 영실과 어리목에서 피어 올라온 구름이다. 남벽 위로 치마를 펼치듯 하얀 구름바람이 휘감았다. 희뿌연 안개, 꿈속 같은 백설의 세상으로 남벽이 숨어버렸다.
● 여행수첩
■ 한라산의 5개 코스 중 백록담을 오를 수 있는 곳은 성판악과 관음사 2개 코스 뿐이다. 돈내코 코스는 윗세오름으로 연결돼 어리목과 영실 코스와 연계된다.
■ 돈내코 코스로 왕복할 경우 남벽통제소까지 7시간, 윗세오름대피소까지 9시간 예상해야 한다. 영실이나 어리목에서 산행을 시작해 돈내코로 내려올 경우에는 6시간 정도 걸린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오후 1시가 넘으면 돈내코로 내려가는 길을 통제한다. 남벽통제소에서도 오후 2시면 윗세오름통제소로 올라가는 길을 통제한다.
■ 눈보라가 심할 경우 윗세오름통제소와 남벽을 잇는 능선길이 자주 통제된다. 길이 눈에 파묻혀 위험하기 때문이다.
■ 영실이나 어리목에서 산행을 시작할 때는 승용차 대신 버스 등을 이용하는 게 좋다. 영실 어리목을 잇는 1100도로가 눈길로 미끄럽기 때문이다. 돈내코 코스 입구는 눈이 쌓이지 않아 항시 승용차로 접근하기 쉽다.
돈내코 코스 중간에는 평궤대피소에만 간이 화장실이 있다. 간단한 음료나 라면 등을 사먹는 휴게소는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점심은 미리 준비해오는 게 좋다. 눈이 깊게 쌓여있어 등산화, 아이젠, 스패치 등 겨울등산 장비는 필수다.
■ 한라산국립공원 연락처(064) 어리목 713-9950~3, 성판악 725-9950, 영실 747-9950, 관음사 756-9950, 돈내코 710-6920~3
■ 승우여행사는 올레길 걷기와 한라산 돈내코 코스 설경 감상을 묶은 2박3일 제주 패키지 상품을 출시했다. 2월 7, 14, 17일 출발, 세차례 진행된다.
첫날은 돌문화공원 등을 둘러보고 이튿날 서귀포 올레길 걷기와 마라도 관광, 마지막날 영실-돈내코 코스의 한라산을 등반한다. 참가비는 항공 숙박 식사비 등을 포함해 2인1실은 1인 31만5,000원, 3인1실은 31만원, 4인1실은 30만5,000원이다. (02)720-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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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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