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안일 나몰라라"… 귀가후 손 쓰는 일은 TV리모컨 누르기뿐
"남편이 하루 20분만이라도 집안 일을 도우면 얼마나 행복할까."
결혼 5년차 중학교 교사인 우현정(33)씨는 남편이 야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보기술(IT) 업체에 근무하는 남편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TV 보다가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게 일상이다.
주말에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진공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곤 하지만 어느새 거실에 드러누워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잠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달 토요일에도 그랬다. 놀토(노는 토요일)가 아니어서 밥을 지어 놓고 학교에 나갔는데 오전 늦게 일어난 남편은 10분마다 전화를 걸어 "언제 퇴근하냐"고 계속 보챘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한걸음에 달려와 보니 남편은 네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소파에 삐딱하니 누워 "배고프니 어서 밥부터 먹자"고 성화였다. 우씨는 남편도, 나도 밖에서 같이 돈 버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 싶어 들어 한판 쏘아붙이려다 꾹 참았다.
그나마 주말은 좀 나은 편이다. 평일에는 모든 집안 일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우씨는 "거의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니 저녁 7시쯤 퇴근하고 나면 누워서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밥 먹이고, 책 읽어 주고, 놀아 주다 보면 온몸이 천근만근 녹초가 되지만 그제서야 퇴근하는 남편은 본체만체 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남성 육아휴직 있으나 마나
남편 박상준(34)씨도 할 말은 있다. 직장이 멀어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다 보니 집안일을 돌볼 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육아휴직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박씨는 "이틀간 출산휴가도 상사 눈치 보다가 간신히 쓸 수 있었다"며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가족을 핑계로 일찍 퇴근했다가는 내일 당장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20~40대 부부 중 맞벌이가 70%에 육박하면서 실제 맞벌이 남편의 육아휴직 신청자 수는 2007년 310명, 2008년 355명, 2009년(11월까지) 459명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체 대상자의 1% 남짓에 불과한 수치다.
2008년의 경우 신청자 355명 중 236명이 공무원이고 나머지 119명 가운데도 공기업 직원이 대거 포함돼 있어 민간 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육아휴직 신청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다. 사실상 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시댁도 남의 편
대기업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정현아(35)씨는 야근과 회식이 잦다. 두 살 난 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부장은 그때마다 "여자라고 예외 없다"고 공포를 조성한다.
이달 초 야근 때는 방산업체에 다니는 남편이 먼저 퇴근했다가 아이가 열이 나서 보채는 걸 보고 "그러려면 회사 그만 두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한바탕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하면서 구입한 서울 금호동의 30평대 아파트 원리금을 갚으려면 외벌이로는 어림도 없다. 정씨는 "일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집에 눌러앉아 아이와 놀아 주고 싶지만 마음뿐이다"고 하소연했다.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조은미(가명·31)씨는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프로젝트 마감일 앞두고 야근을 하느라 남편(35)에게 세 살 난 아이를 맡긴 게 화근이었다.
저녁 7시가 넘어 남편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었고 조씨는 일을 팽개치고 집으로 뛰어가야 했다. 남편이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건 새벽 3시.
조씨가 그간 쌓였던 감정을 터뜨리자 남편이 홧김에 던진 무선전화기가 아이 얼굴에 맞으면서 생채기가 났다. 조씨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밤새 아이를 껴안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아침에 걸려 온 시어머니의 전화에 속이 뒤집혔다. "남자가 바깥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조씨는 바로 친정으로 달려가 한동안 농성을 했다. "남편이고 시댁이고 다 꼴도 보기 싫더라. 왜 바둥거리며 밖에서 열심히 일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워킹 맘들은 일과 남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 돈도 벌고 집안일도 다하고… 맞벌이 아내는 무쇠?
맞벌이 가정에서 부인의 가사 노동 시간은 남성의 3~7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계숙 경희대(생활과학부) 교수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집에 가사조력자를 두지 않은 채 미취학 자녀를 보육하고 있는 253명의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부의 평균 가사 분담 시간은 평일의 경우 남편 34분12초, 부인 4시간3분36초고 주말에는 남편 2시간52분48초, 부인 9시간15분36초인 것으로 집계됐다.
맞벌이를 하더라도 남편은 생계를 부양하고 부인은 집안을 돌보는 전통적 성별 분업과 가사 분담 구조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사 노동 시간은 부부 모두 평일에 비해 주말이 월등히 길었다. 특히 부인의 절대 가사 노동 시간은 주말에는 무려 9시간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는 여성은 주말에도 집에서 편히 쉬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다만 남편의 주말 가사 노동은 평일에 비해 4배로 늘어 2배로 증가한 부인에 비해 증가 폭이 컸다. 젊은 남편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편이 주말에 가사 노동을 많이 해도 부인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은 오히려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일에는 나 몰라라 하던 남편이 주말에 가사에 적극 참여하는 것에 대해 부인 스스로가 자신의 직장 생활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결국 맞벌이 여성들은 일과 가사, 심리적인 자책감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유 교수는 "남편의 참여를 늘리되 주말이나 휴일로 몰아서 하기보다는 평일부터 부부 간 가사 분담을 나눠야 불필요한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 인터뷰/ '파파쿼터제' 도입 앞장서는 천준호 대표
"아빠의 육아 참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엄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천준호(39) 한국청년연합회 공동대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는 2006년 '일과 아이를 위한 시민행동'을 결성해 파파쿼터제 도입에 앞장서고 있다.
파파쿼터제는 부인이 출산하면 남편에게 1개월의 휴직을 보장하고 월급의 100%를 고용보험에서 지급하는 제도다. 한국에서는 꿈만 같은 얘기지만 스웨덴 노르웨이 등에서는 도입 후 행복지수와 출산율 증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천 대표는 30대 아빠들을 "육아에서 버림받은 외톨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직장에서의 불안감, 치솟는 교육비와 집값 때문에 젊은 아빠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라며 "뒤늦게 가정으로 눈을 돌려도 아이와 부인 모두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천 대표 자신도 그랬다. 첫아이가 18개월 때 바닥에 머리를 찧는 모습을 보고 막무가내로 중학교 교사인 부인을 나무랐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의사 표현이 서투른 어린 아기들이 보이는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천 대표는 "육아를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다 보니 아이에게 일이 생기면 언성부터 높아지더라"고 회상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나쁜 아빠 100명과 함께 시민행동을 결성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빠들이 육아를 외면하니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기 힘들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란 생각에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개인이나 가정이 아니라 사회의 무관심과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힘든 잘못된 육아 환경에 있었다.
천 대표는 "저출산을 젊은이들의 삐뚤어진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의 문제로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며 "말로는 육아휴직이 당연한 권리라면서 실제로는 죄악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 대표는 "최근 아빠의 육아 참여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는 등의 변화가 고무적"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부의 대책이 변죽만 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 대표는 "낙태를 금지하거나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한 살 낮춰 놓고 저출산 육아 대책이라고 내세우는 건 코미디"라고 말했다.
그는 "육아휴직 대체 인력에 대해 월 60만원씩 정부가 지원하는데 이 급여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식의 비정규직은 아무리 많아도 좋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이 몰린 공단에 번듯한 육아 시설을 지어 주면 저출산과 육아, 중소기업 육성, 청년 실업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발상의 전환을 주문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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