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가 한국을 강타했다.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 역의 웬트워스 밀러는 당시 '석호필'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얻어 커피, 청바지 등 국내 광고까지 찍었다. 미드 열풍은 첩보물인 '24', 초능력자들의 활약을 다룬 '히어로즈' 등으로 순식간에 번졌다. 그 해 10월 한국일보가 네티즌 2,435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34.6%가 미드에 푹 빠져 있다고 응답했고, 영어학원들은 앞다퉈 미드를 교재로 채택했다. 그랬던 미드 열기가 주춤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상파 방송에서 느껴진다. '프리즌 브레이크'로 미드 선풍을 주도했던 SBS는 이번 1월 개편에서 미드를 아예 편성조차 하지 않았다. 블랙코미디 '위기의 주부들'로 인기를 얻었던 KBS와 탄탄한 마니아층을 보유한 수사물 'CSI 과학수사대'를 방영 중인 MBC는 미드 방송 시간을 지난해 100분에서 50분으로 절반 가량 줄였다.
미드 인기의 주춤세는 드라마 수입량에서 확 드러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자료에 따르면 방송 프로그램 수입 물량 중 드라마의 비중은 2007년 상반기 55.3%에서 2009년 상반기 33.0%로 줄었다. 전체 프로그램 수입액은 907만달러에서 2,078만달러로 129.1%나 늘었지만 미드는 501만달러에서 686만달러로 36.9% 증가하는 데 그쳐 전체 증가세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원인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새로운 '킬러 컨텐츠(Killer Contents)'의 부재다.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으로 신선함이 떨어졌고, 시청자들을 다시 끌어 모을 만한 새 드라마도 선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신상대 SBS 편성기획팀장은 "최근 들어 미드 인기가 주춤하다"면서 "동계올림픽 붐 조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올해 편성에서 미드를 뺐다"고 설명했다. 편성 전쟁에서 미드가 스포츠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최근 종영한 KBS의 '아이리스', MBC '선덕여왕' 등 국내 드라마의 블록버스터화도 미드로 향하던 시청자들의 눈길을 돌리는 데 한몫 했다. 김용두 KBS 편성기획팀 선임은 "국산 드라마 제작에도 영화 촬영장비가 도입되는 등 수준이 높아져 시청자들이 굳이 미드를 찾아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면서 "(국내 방송 컨텐츠 보호를 위한)국수주의 편성이 아니냐는 지적을 우려해 미드에 일정 시간을 할애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2007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미국작가협회 파업으로 인한 제작 중단 사태도 미드에 대한 관심을 수그러들게 했다. 당시 '히어로즈'를 즐겨봤다는 김채현(31)씨는 "다소 황당하게 종영하는 바람에 기대감이 많이 떨어졌다"면서 "이제는 미드에 별로 관심이 없어 거의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드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 감소는 광고 감소로 직결됐다. 박성은 MBC 편성컨텐츠부 프로듀서는 "광고 수주가 줄어들어 편성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다만 일부에서는 마니아를 중심으로 미드 열기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첫 회부터 시청률 6%를 넘어섰던 '프리즌 브레이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CSI 과학수사대'가 지난 주 3.9%로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고, 케이블 채널이 방송하는 미드들이 1% 안팎의 시청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채널 온미디어 홍보팀 안애미 차장은 "2~3년 전의 미드 붐은 볼 수 없지만 고정 시청층을 위주로 미드 열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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