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극단 이루의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는 사실주의의 힘으로 간다.
무대가 그리는 현실은 끔찍하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지만 농촌이라면 으레 붙어다니는 향토성, 복고주의, 살뜰한 인정 등의 가치는 일절 없다. 현재 농촌이 안고 있는 모순을 극명하게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리얼리즘의 이념을 따른다.
가상현실의 시대지만 정직한 리얼리즘의 힘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는다. 양푼이 한 개에 담긴 밥을 함께 먹는 가난한 식사, 먹던 국을 상대의 입에 미어터져라 넣어주는 모습은 근래 보기 힘든 사실적 풍경이다. 옷 속에 손을 넣어 서로의 등을 긁어주는 모습 역시.
사실적 소품이 따른다. 소쿠리, 말린 옥수수, 호박 등인데 무엇보다 큰 방 방문 위에 내걸린 아들 사진은 시골집의 풍경 그대로다. 지금의 모습을 여과없이 담기도 한다. 화상통화, 경박한 신호음 등 이 시대가 '정확히' 재현된다. 막전에 계속 흘러나오는 동요는 사실성을 더하면서 객석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서울 배우들이 능란하게 구사하는 경주지역 사투리의 힘도 한몫한다. 국립극장과 예술의전당이라는 큰 무대에 설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다.
드센 어머니 '붙들'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력도 압권이다. 아들의 병에 치료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광란하고 오열한다. 무능한 남편에게 "등신아"라며 숫제 발악이다. 식구들을 조롱하는 이웃과도 싸운다. 찢어질 듯한 아우성과 욕설, 밥상이 날아가고, 머리채를 서로 움켜잡는다. 그러나 악의도 꼼수도 없다. "마이 떠들었디(많이 떠들었더니) 배고프다"고 말문 닫는 모습에서는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이 연상된다.
그러나 연극은 복고를 거부한다. 이 시대의 농촌상을 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웃의 정이 사라진 농촌의 자리를 교회 나오라는 목사의 말이 채운다. 무대는 그러나 잃어버린 개를 찾는 데 온 신경을 쓸 뿐인 목사에게 일침을 놓는다. 개를 찾았다는 마을방송이 나오는데, 애지중지하던 목사의 개가 잡견과 놀아났다는 말을 고소하다는 듯 붙인다. 무대의 리얼리즘은 오늘날 농촌의 디스토피아를 재현한다.
단 한 대목, 꿈처럼 아름다운 장면이 있다. 식구들이 방에서 노는 모습을 그림자극처럼 재현한 대목에서는 징그러운 가난마저도 따뜻하게 보듬는 작ㆍ연출자 손기호의 의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한 이불 밑에 세 식구가 누운, 지독한 가난의 장면마저도 살갑다.
객석의 반응은 차분하다. 붙들의 욕 사설에 웃음보를 터뜨리다 이들 가족에게 잇달아 닥치는 시련의 모습에 여자 관객들은 눈물을 훔친다. 리얼리즘의 힘이자 미덕이다. 24일까지 선돌극장.
장병욱기자 aje @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