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요즘 끊임없이 파고 드는 인파이팅 복서 같다. 지난해 8월 초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이후 줄기차게 펼치는 대화와 협상 공세를 보면 그렇다. 그제 외무성 성명을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회담을 제의한 것도 그런 공세의 하나다.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는 대남ㆍ대미 비방 대신 적극적 관계 개선을 희망했다. 과거 신년공동사설과는 판이한 자세다.
은근히 남북정상회담을 채근해오고 있는 지도 오래됐다. 새해 벽두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설이 무성한 것 역시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 가려는 최근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과거와 다른 대화ㆍ협상 공세
그에 비해 남한의 대응은 아웃 복서처럼 비친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에서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며 남북간 상시적 대화를 위한 기구 마련을 제안했다. 그러나 비핵화 진전을 앞세움으로써 북한의 대화 공세를 슬쩍 비켜서 김을 빼며 반격하는 아웃 복싱을 구사한 느낌이 강하다. 북측의 남북정상회담 채근에도 과거처럼 이벤트성 회담은 안 된다며 링 사이드로 몸을 뺀다.
평화협정 회담 제의에 대한 반응도 그런 측면이 있다. 북측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던 6자회담에 복귀 의사를 비치면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미국도 어느 정도 동의함으로써 평화체제 문제를 제쳐 놓고서는 6자회담이 잘 굴러가지 않게 된 형세다. 그런데 정부는 비핵화 초점을 흐리려는 술책이라고 의심을 앞세운다. 또 한 스텝 비켜서는 것이다.
그 동안 북한이 대외 협상에서 보여온 행태에 비춰 요즘의 대외 대화ㆍ협상 공세를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북한의 그런 버릇을 고쳐놓아야만 진정한 남북관계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명박 정부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북한 움직임은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 이후 가해진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 압박을 회피하기 위한 일시적 전술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여름 김 위원장의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한 후 북한은 한반도에 강도 높은 긴장을 조성했다. 개성공단 통행 제한 등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갔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한 국가전략을 '플랜 B'로 전환했다는 분석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6자회담 틀에서 핵 폐기와 체제 보장 및 경제 지원을 맞바꾸는 전략에서 자력갱생과 핵 보유를 통한 체제 유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남한의 보수정권 출범 등 대외적 환경변화와 김 위원장의 건강 악화로 인한 위기감을 감안할 때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건강이 회복되고 공식 활동을 재개하면서 상황은 또 달라졌다. 김 위원장은 2000년 6ㆍ15 정상회담 이후 보여준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적극적 대외 제스처는 그런 자신감의 반영일 것이다. 물론 핵 폐기와 체제 보장 및 경제 지원을 맞바꾸는 전략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 지난 연말 화폐개혁을 전격 단행해 계획경제를 강화한 것을 보면 중국이나 베트남 식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희박하다.
'핵 없는 새 집' 지어야 할 시점
그러나 북한이 자력으로만 주민들에게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도록 하기는 어렵다. 최근 김일성 주석의 이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한 김 위원장이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 것이다.
김 위원장에겐 지금 새로운 그림이 필요하다. 핵으로는 주민들에게 흰 쌀밥과 고깃국을 먹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핵으로 지은 헌 집이 아니라 핵 없는 새 집의 그림이 필요하다. 그것이 비핵화와 평화체제라면 그 새 집을 짓는 데 이명박 정부도 적극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겸 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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