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합동브리핑룸에 들어선 정운찬 총리는 크게 긴장하지 않은 듯했다. 쉴새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는 10여분간 발표문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문구의 강약을 조절하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속내까지 그랬을까. "세종시는 한번도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는 핵심 의제였습니다." 발표문의 첫 문장에는 정 총리의 소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말처럼 지난해 9월 총리에 지명된 이후 세종시 문제는 정치권을 뒤흔든 태풍이었다. "세종시 원안은 수정되지 않을까 한다"는 취임 일성으로 정 총리 역시 정치적 격랑에 운명을 내맡겨야 했다.
정 총리는 앞서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의 마지막 전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도 "혼신을 다해 충청지역에, 국가균형발전에 무엇이 도움되는지, 한국이 앞으로 100년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며 고뇌를 내비쳤다. 평소와 달리 프롬프터(자막기)를 이용해 발표문을 낭독하고, 취재진을 피해 아침 일찍 사전 리허설을 진행한 이날 상황은 4개월여간 그를 옥죈 부담감과 그의 의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발표문 곳곳에는 향후 여론의 부침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정 총리의 의지가 배어 있다. 그는 "세종시 수정은 어제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자, 새로운 내일의 토대를 다지는 시대적 과업"이라며 수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때론 "밤 새워 고뇌와 번민을 거듭했다" "정책의 일관성을 허물게 돼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한 발 비껴선 모양새를 취했지만 결국엔 "국가적 대사를 결정하는 기준은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밝혔다. 정 총리는 수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당부하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일체의 질의 응답 없이 배석한 국무위원들과 함께 퇴장했다.
정 총리는 수정안 발표 직후 대전으로 내려갔다. 먼저 대전 국립 현충원을 찾아 "애국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정신을 받들어 세종시를 국가 발전의 전진 기지로 만들겠다"는 방명록을 남기고, 이어 용산 참사로 순직한 경찰 묘소를 참배하는 등 거듭 의지를 되새겼다. 저녁에는 대전 지역 방송사들과 공동 회견을 진행하며 충청권 민심을 다독이려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여론전을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충청권 여론은 만만치 않았다. 정 총리와 일행이 탄 버스는 대전MBC 앞에서 계란 세례를 받았다. 자유선진당과 민주당 당원 60여명은 버스를 향해 '매향노', '행복도시 원안사수'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흔들며 시위를 벌였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사진,대전=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