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다음 달인 1988년 3월 대통령에 대한 민간 자문기구로서 '구조조정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리나라가 고임경제, 개방경제, 그리고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찾는 성숙사회로 이행하기 위해 장단기 정책방향을 제시하자는 것이 기본취지였다.
이 위원회는 대통령령으로 설치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25명 내외의 각계대표로 구성하였는데 내가 실질적인 운영책임을 맡게 되었다. 위원장에는 삼고초려 끝에 유창순 전 국무총리를 모셨으며 KDI 원장(당시 구본호 박사)이 간사를 맡아 KDI가 실무적인 뒷받침을 했다.
위원회에는 대외경제정책·산업구조조정·국민생활 등 3개 분과를 두어 서울대의 정병휴 교수, 경희대의 김광석 교수, 고려대의 김윤환 교수 등 세 분이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이 회의는 위원 전원이 거의 매일 KDI에 모여 진지한 토론을 거쳐 정부에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여러 차례 대통령 보고회도 가졌다. 그리고 그러한 장단기 정책방향을 모아 연말에는 종합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 위원회에서의 토론은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금융실명제 문제는 그 중 하나였다.
노태우 정부에서 약속한 개혁적인 정책 가운데 불발로 그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금융실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은행의 독립성 강화를 위한 한은법 개정이었다.
1982년5월 거액어음을 사취하여 사채시장에서 유통시킨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금융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매우 높았다. 이를 반영하여 1987년의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실명제 실시를 공약했다.
구조조정위원회와 금융발전 심의위원회에서도 실명제 도입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대통령은 몇 차례 나를 불러 이 문제를 논의한 바 있었다. 나는 일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백년대계를 위해 실명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렸다.
대통령은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나 정치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실명제는 일단 도입하고 부작용은 보완책을 세워 최소화하자는 방향으로 정리를 하였다. 이에 따라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 등 경제부처도 모두 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데 합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기획원은 88년 10월 14일 금융 실명제를 91년 1월 1일부터 전면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89년 4월 11일에는 금융실명제 실시준비단을 발족시켜 본격적인 실시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실시준비단 발족 1년 뒤인 90년 4월 4일, 당시 나는 정부를 떠나 있었는데 이승윤 부총리는 돌연 금융실명제 실시의 무기연기를 발표하였다. 그 이유는 경제사정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씨로 대표되는 보수 3당의 합당으로 보수정치세력과 대자본 간의 보수대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이 금융 실명제를 원치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일본에서도 금융 실명제를 1987년부터 실시키로 1980년에 법을 제정했는데 실시연도인 87년에 가서 이 법을 폐기시켜버린 일이 있었다. 그만큼 실명제의 도입은 저항이 많은 것이다. 다행히 우리 경우는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정부에서 금융실명제를 단행했는데 이것은 김영삼 정부의 큰 업적으로 꼽을 만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불발에 그친 또 다른 개혁 법안은 한은법 개정이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의 민주화과정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8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한은 독립성보장을 위한 한은법 개정을 공약했다.
특히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 취임 1년 안에 한은법을 고치겠다고 했는데 마침 87년 12월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박성상 한은 총재의 발언을 계기로 이 문제가 표면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에 이기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달라졌다. 노태우 정부는 재무부의 의견에 따라 한은의 독립성 강화에 반대했고 한은은 야당을 뒤에 업고 독립성 강화를 쟁취하려는 다툼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88년 3월 25일 박성상 총재가 임기를 1년10개월이나 남겨놓고 김건 씨로 경질되었다. 정부에 밉게 보인 것이다.
재무부의 주장은 한은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보장하되 은행감독원은 떼어서 정부로 이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은은 은행감독원도 한국은행 안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한은은 야당 외에는 정부안에 의지할 곳이 없어 내게 자주 찾아와 도움을 청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사공일 재무장관과 나는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독립성도 보장하고 은행감독원도 계속 한은 안에 두되 다만 대통령이 임명하는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임하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냈는데 이번에는 김건 한은총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88년 12월 이규성 재무장관이 부임하여 89년 초에 3개월 동안 23차례나 대책반 회의를 통해 절충을 시도했으나 단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이 문제는 계속 이전구투를 되풀이 하다가 결국 없었던 일로 하기로 타협하여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한은의 독립성을 높이고 위상을 강화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은 내가 한은 총재로 재직하던 2003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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