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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책 구걸하는 공공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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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책 구걸하는 공공도서관

입력
2010.01.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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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일이다. 당시 내가 출간한 책과 관련한 인터뷰 기사가 어느 신문에 실렸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한 공공도서관장 이름으로 장문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A4 용지 두 쪽 분량이나 되지만 요지를 간추리면 이렇다.

웅장한 시설에 민망한 관행

"귀하께서 온갖 정성을 기울여 출간하신 저서는 역저(力著)로서 먼저 진심으로 출간을 축하 드립니다. 귀하의 저서는 본 도서관에서 심혈을 기울여 찾고 있는 귀중한 도서자료로 사료되어 본 도서관에 비치 소장하는 것이 무한의 영광이라 생각되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도서관은 국내 공공도서관으로서는 가장 웅장한 시설을 갖춘 동양권에서도 굴지의 도서관이며 장서능력도 50만 권, 열람석도 5,000석을 갖추어 명실상부한 ○○지역의 중심정보센터로서 지식 정보의 제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으실 것으로 사료되오나, 금반 출간하신 귀중한 도서를 기증하여 주시면 이용자 정보 제공에 널리 활용하겠으며, 영원토록 장서로 보존하겠사오니 적극적인 협조를 앙망하오며 귀하의 무궁한 발전과 가정에 행운이 충만하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정중하고 깍듯한 인사치레로 포장을 했지만, 간단히 말해 책 한 권 도서관에 기증해 달라는 내용이다. 그 당시 알아본 바로는, 우리나라의 공공도서관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구걸하듯이 책을 기증 받아 장서를 채우고 있다고 했다. 몇몇 도서관 직원들은 매주 일간지에 실리는'북 섹션'을 점검해 책 구걸을 아예 정규 업무의 일환으로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우이웃을 돕는 자선단체 도서관이라면 혹 모르겠다.'국내 공공도서관으로서는 가장 웅장한 시설을 갖춘, 동양권에서도 굴지의 도서관'이 책을 거저 보내달라고 통사정하고 있었다. 고급 양복에 고가의 외제차 탄 신사가 기름 값이 없으니 한 푼 보태달라고 구걸하는 꼴이다. 장서 능력이 50만 권이면 무엇하겠는가. 앵벌이로 채워진 장서가 제대로 된 자료 구실을 할 수 없다. 국가 발전을 위한 지식 기반의 견인차가 되어야 할 공공도서관이 웅장한 시설이나 자랑하며 도서 구입에 그토록 인색하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지난 연말 출판사 편집자들과의 조촐한 송년회에서 10년 전 그 일을 들려주었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였다. 실제로 그 일을 겪고 나서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더 이상 도서 기증 요청을 받아보진 못했다. 당연히 도서관들도 전과는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변했는가. 그래서 "요즘은 그런 일이 없죠?"하고 물었더니 "뭘 모르시는군요"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요즘도 그런 편지가 출판사에 종종 온다는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긴 구걸을 할 바엔 저자를 찾아 다니는 것보다야 출판사를 찾는 편이 훨씬 효율(?)이 높을 게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공공도서관의 의무적인 학술도서 구입이 오래 전부터 제도적으로 정착돼 있다.

'국가 품격'과 거리 멀어

출판 경영자들은 전국의 공공도서관들이 몇 권씩만 의무적으로 구입해줘도 안심하고 학술 서적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독자들의 구매에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학술 도서의 경우 아무리 좋은 책을 찍어도 5백 권도 안 팔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작비도 제대로 건지기 힘든 현실이다.

공공도서관 수준이 이 지경이라면 '국가의 품격'을 말하기도 민망하다. 새해에는 '공공도서관 구걸중지 캠페인'이라도 벌여야겠다. 도서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외부 과시형 곁가지행사를 줄이고 도서관의 기본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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