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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소 풍속도가 달라졌다/ "영어이름도 사주 따져요… 다니엘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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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소 풍속도가 달라졌다/ "영어이름도 사주 따져요… 다니엘 굿!"

입력
2010.01.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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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제인'(Jane)이라고 짓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5일 서울 중구 신당4동의 한 작명소(백민역학연구원). 역술인 양원석(56) 원장이 슬쩍 긴장한 눈치다. 며칠 전 태어난 늦둥이 첫딸의 이름을 짓겠노라 찾아온 아빠(39)는 의기양양하다. "미국유학 마치고 교수로 있는데, 아무래도 글로벌시대니까 외국인이 부르기 쉽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듣기에도 예쁘잖아요."

양 원장이 한참이나 요모조모 따져보더니 운을 뗐다. "오행 중엔 음오행(音五行)이란 게 있어요. 이름을 발음할 때 혀 입술 어금니 등 소리가 나는 근원을 오행에 빗댄 거죠. 그저 듣기 좋다고 다 들어맞는 건 아닌데 다행히 제인이란 이름은 음오행이 조화를 이뤘네요."

조마조마 듣던 아빠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양 원장은 부모와 아기의 연월일시(年月日時),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한자, 태명(胎名), 친인척 이름 등을 30분 넘게 꼼꼼히 물은 뒤에도 사흘의 말미를 더 달라고 했다. 이름에 획수와 뜻이 어울리는 한자를 입히기 위한 작업 때문이다.

고객을 보낸 뒤 양 원장은 역술관련 책 한 무더기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아기 사주를 얼추 찾아보고 이것저것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부모들이 많아져서 진땀을 뺀다"고 했다. 사흘 뒤 아기는 제인(齊仁)이란 이름을 얻었다. '남에게 어질고 공손하게 하라'는 뜻, 부모는 흡족했다.

평생 간직할 자녀의 이름을 잘 짓고자 하는 건 모든 부모의 바람일 터. 요즘엔 무턱대고 작명소 문간을 넘지 않는다. 미리 인터넷이나 관련서적으로 사주와 작명방법을 공부해 이름 서너 개는 기본으로 챙겨간다. 영어이름을 선호하고, 중성적인 이름을 원하는 것이 최근 분위기다.

알파벳에도 음양오행이 있다?

작명가들은 "최근 작명소를 찾는 10명 중 한두 명은 꼭 영어이름을 바란다"고 했다. 영어이름 선호는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신생아를 둔 부모. 6일 서울 강서구 미즈아가행복작명원에서 만난 항공사 직원 윤모(41)씨는 전날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케빈(Kevin)이라 지어온 뒤 팔자를 물었다. 한가경(52) 원장이 뜯어말렸다. "사주를 보니 음오행 상 '화'(火)가 필요한데 케빈에는 없어요. 다니엘(Daniel)이라고 지으세요."

풀이는 그럴듯한데 알쏭달쏭했다. 영어에도 동양에서 활용되는 오행이 통하는 걸까. 한 원장의 설명은 이렇다. 한글 자음 14개를 소리가 나는 곳(입술 혀 등)에 따라 분류하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케빈의 'ㅋ'은 목, 'ㅂ'은 수에 해당하고, 다니엘의 'ㄷ'과 'ㄴ'은 화, 'ㅇ'은 토에 속한다는 식이다.

이미 이름이 있는 대여섯 살 된 아이들의 부모도 많이 찾아왔다. 한결같이 영어유치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유치원에서 불리고, 앞으로 국제화 시대에 유용하게 쓰일 이름인 만큼 제대로 짓겠다는 바람이 담겨있는 셈이다. 음오행을 따져 보통 일곱 개를 지어준 뒤 고르게 한단다.

유학을 떠나는 대학생들과 사업상 필요한 성인들도 영어이름을 짓기 위해 작명소를 찾았다. 한 원장은 "영어이름 문의가 많아서 한글이름을 지을 때 어울리는 영어이름 하나를 덤으로 지어주고 있다"고 웃었다.

부자 되게 하되 성별은 드러내지 마라!

한글이름은 언뜻 들어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이름이 대세다. 민서 지원 지우 등 발음이 부드럽고 쉬우면서도 중성적인 냄새가 나는 이름들이다.

작명소에서 만난 회사원 윤수진(32)씨는 "지난해 12월 말 태어난 딸에게 너무 여성스러운 이름은 싫어서 '서우'라는 중성적인 이름을 지어줬는데, 괜찮은지 상담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남녀 구분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데, 남자이름 따로 여자이름 따로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덧붙였다.

중성이름을 선호하는 분위기는 지난해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법원이 2008년 출생한 신생아의 이름 순위를 조사한 결과, 특히 여자아이 이름은 서연 지민 서현 등 중성취향이 심했다. 남자는 '민준', 여자는 '서연'이라는 이름이 5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름에 담기기 원하는 복은 단연 재운(財運)있었다. 최봉수철학원의 최봉수 원장(82)은 "금융위기 경기침체 취업난 등 팍팍해진 경제사정이 반영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재산의 성질을 지닌 목(木)이 들어간 한자를 추천한다"고 귀띔했다.

2008년부터 시행된 가족관계등록부도 영향을 미쳤다. 이혼 등의 사유로 싱글맘이 된 엄마나 재혼가정에서 바뀐 성(엄마 혹은 계부)에 따라 개명을 하려고 상담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것이다. 양원석 원장은 "아버지 성을 따라 이름을 짓던 전통이 차츰 변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 촉망 받는 이름은?

작명가들에게 경인년(庚寅年)에 태어날 아이들에게 적합한 이름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광일 성명학회장은 "경(庚)은 오행 중 금, 인(寅)은 목인데, 이를 중화할 수 있는 화에 해당하는 글이 들어가면 좋을 수도 있지만 작명의 핵심은 태어난 날(日)이기 때문에 일반화는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좋은 이름에 대한 맹신도 경계했다. 이봉무 한국명리학회장은 "국회의원 중 반 이상이 이름이 좋지 않은데도 당선된 것을 보면 후천적인 운과 노력이 많이 작용한 것"이라며 "이름은 사주에 안 좋은 것을 보완하는 수단 정도로만 여기라"고 조언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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