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직후 모랫바람이 휘몰아치는 압록강 국경 근처, 세 남자가 말을 타고 다가온다. 다 해진 옷을 입은 사내들이지만, 누더기 사이로 보이는 우람한 이두박근과 조각 같은 복근이 여심을 자극한다. 바람을 타고 화면을 흐르는 모래 알갱이, 머리카락의 흩날림까지 코 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노비들이 새해 벽두부터 지체 높으신 양반들 머리 위에 우뚝 섰다. KBS 2 TV의 새 수목 사극 '추노'가 방송 첫 주부터 주간시청률 21.1%로 양반들의 이야기인 KBS1 주말 사극 '명가'(13.7%)를 제쳤다. 6일 첫 회 시청률 22.9%로 지난해 사극의 맹주로 군림했던 MBC '선덕여왕'의 첫 회 시청률(16.0%)보다 높았다. '추노'가 이토록 눈길을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 시대와 오묘한 조화
무엇보다 소재가 참신하다. 극의 배경인 17세기 초 한양 전체 인구의 50%를 넘어 대다수를 차지했던 노비들의 이야기다. 노비들의 신세 한탄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염려는 붙들어 매도 좋다. '추노'의 줄기는 죽기보다 힘든 생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노비들과 그들을 쫓는 추노꾼들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시청자가 노비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도록 친절하게 도와준다. "조정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왕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암투, 정쟁 등은 '추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사극이면서 현 시대와 오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점도 매력이다.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대표되는 어려운 현실과 맨몸으로 부딪혀 싸우지 않고서는 사람답게 살기가 어려운 당시의 상황이 묘하게 겹치면서 노비들의 활약은 시청자들을 대리 만족시킨다.
업그레이드 된 화면
제작진은 '길바닥 사극'을 천명했지만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은 전혀 '길바닥'스럽지 않다. 칼을 든 오지호가 산 정상에 서서 적진을 바라보는 첫 장면이나 격투 중 시간의 흐름이 부드럽게 느려지며 액션을 부각시키는 장면 등은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의 오마주인 듯하다. 영화를 드라마에 옮겨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촬영장비의 덕이다.
1등 공신은 레드원 카메라다. '추노'의 최지영 책임프로듀서는 "영화 '해운대' '국가대표' 등을 촬영한 장비로 해상도가 HD(고해상도) TV보다 4배 높다"고 레드원 카메라를 소개했다. 하드디스크에 바로 저장하는 방식이라 테이프를 쓸 때 나타날 수 있는 화질 저하가 없는 것도 장점이다. 음향은 일반 드라마 음향팀이 아닌 KBS의 사내 전문기업 '폴리사운드'팀이 맡아 화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빠른 전개와 탄탄한 연기
첫 회부터 빠르게 치고 나갔다.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의 죽음은 프롤로그의 내레이션으로, 주인공 장혁의 성장 배경은 극중 대립 관계인 성동일의 대사로 처리하는 등 군더더기를 과감히 들어냈다. 1회 전체를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할애해 초반부터 긴장감을 떨어뜨렸던 MBC '태왕사신기'와는 대조적이다.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급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도 '추노'의 중심축이라 할 만하다. 노비로 등장하는 공형진과 이원종, 장혁이 노비를 잡아오면 구전을 떼 거간꾼 노릇을 하는 포교 이한위 등 모든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며 재미를 극대화한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경쾌한 전개 위에서 재주를 펼치는 게 '추노'의 특징"이라며 "영화 같은 사극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고 평가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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