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랭킹 20위 안에 들어 언니들과 함께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는 게 목표에요."
'탁구소녀' 석하정(25ㆍ대한항공)은 올해 목표를 묻자 '비즈니스 클래스 확보'라는 의외의 답변을 던진 뒤 빙긋이 웃었다. 운동선수의 '모법답안'은 메달 욕심인데 다소 엉뚱한 답변이 돌아온 까닭에 기자도 웃음이 터졌다. 탁구 국가대표팀은 세계랭킹 20위 안에 들어야만 해외대회를 나갈 때 '특석'인 비즈니스석을 이용할 수 있다. 랭킹 33위인 석하정은 아직까지 이코노미석에 머물러 있는 까닭에 비즈니스석을 통한 '신분상승'은 무엇보다 뚜렷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7일 인천 서구 원당동의 대한항공 여자탁구단 훈련장에서 만난 한국탁구의 기대주 석하정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아 유쾌한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영락 없는 말괄량이인 석하정은 탁구 테이블 앞에만 서면 눈매가 저절로 날카로워지는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청춘과 맞바꾼 희망
2000년 4월6일을 석하정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바로 '태극마크'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한국땅을 밟은 날이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 출신인 그는 아버지(탁구)와 어머니(수영)의 피를 이어 받아 운동선수로는 최적의 체격조건과 감각을 타고 났다. 172cm, 58kg의 그는 "부모님이 모두 운동을 했기 때문에 신체 조건과 유연성, 끼 등은 물려 받은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일찌감치 한국 귀화를 결심한 그는 "중국에서는 탁구 선수층이 방대하기 때문에 경쟁이 너무 심하다. 외국에 가면 오히려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바로 귀화도 가능하다고 해서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걸린 시간만 8년이었다. 2007년 8월에 귀화시험을 통과한 석하정은 "중간에 포기하려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청춘까지 바치며 해왔기 때문에 오기로 버텼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 온 뒤 3년 정도는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빈혈기가 자주 일어나 강한 훈련을 할 수 없었다. 또 엄마, 아빠, 친구들이 보고 싶어 매일 울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최고의 라이벌이자 적은 석하정
석하정은 5월 러시아에서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10일 태릉에 입촌한다. 그는 지난 12월 전국남녀종합선수권에서는 귀화동료인 당예서(대한항공)를 물리치고 국내 일인자로 등극했다. 강희찬 대한항공 감독은 "포핸드 파워 드라이브가 석하정의 주무기다.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수준급의 백핸드 드라이브를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2009년 2월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았던 석하정은 한국 입성 9년 만에 태극마크의 꿈을 이뤘다. 그는 "컨디션만 좋다면 어느 누구를 만나도 해볼 만 하다"며 최근 부쩍 올라온 자신감을 피력했다.
석하정은 좌우명이 자주 바뀐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바뀌지 않은 좌우명 중 하나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다. 강 감독이 '입으로는 세계 최고'라고 농을 던질 정도로 석하정은 '입담'이 만만치 않다. 이 같은 '설레발'은 충분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석하정은 "최근 좌우명은 '나는 내가 이긴다'다. 최고의 라이벌이 나라고 생각하는 만큼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나를 뛰어넘겠다"며 결코 자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인생을 건 올림픽 도전기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석하정은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대표팀선발전 3일을 앞두고 출전 명단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함께 한국으로 날아온 당예서가 2007년 11월에 귀화시험을 최종적으로 통과하는 바람에 밀린 것. 석하정은 "당시에는 언니가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3개월 동안 대표팀선발전을 위해 맹훈련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석하정의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는 광저우아시안게임을 넘어 런던올림픽까지 바라보고 있다. 그는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베이징올림픽 출전 불발의 아쉬움을 만회하는 메달을 따겠다"면서 "런던올림픽은 생애 마지막 올림픽 도전이 될 것이다. 앞으로 2년이 남았는데 내 전부를 쏟아 부을 것"이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석하정의 '코리안 드림'은 이제 그 출발선에 있다.
인천=김두용 기자 enjoysp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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