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의사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분자생물학을 공부한 사람이 한의학을 믿는다고 면박을 주는 분도 있지만 나는 동양의 자연관이 매우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를 매료시키는 건 바로 '체질'이라는 개념이다. 분자생물학적으로 바꾼다면 '유전적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유전자가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므로(일란성 쌍둥이도 조금은 다르다) 그 체질의 다양함이 무한대라고 할까.
생명과학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언어와 인식 체계가 상이한 동양과 서양의 과학이 드디어 만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맞춤 의학'이라는 개념이 그 좋은 예다. 맞춤 의학이란 사람마다 다른 유전자들의 발현 특성을 근거로 환자에 꼭 맞는 처방을 목표로 하는 21세기의 의과학이다.
인간 유전자의 염기 서열의 대부분이 공개된 2000년에 언론들은 치명적 질병들이 정복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걸 인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전체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이 유전자의 활동에 지배 받는 질병들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제시하거나 개발하는 초석이기에 미래 산업을 열었다고 평가 받아 마땅하다.
최근의 생명과학계는 더 나아가 사람마다 다른 유전자의 개성에 주목한다. 생명 현상을 지배하는 것이 유전자이니 유전자의 다형성과 돌연변이 여부에 따라 특정 질병에 잘 걸릴 수도 있고,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개인마다 달라야 할 수도 있다.
영국계 다국적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이레사(Iressa)라는 먹는 항암제가 있다. 성장인자 수용체 EGFR의 작용점을 공격하여 비소세포성 암세포의 성장을 방해하도록 고안된 신약이다. 표적 치료제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레사가 임상 시험 중 부작용이 보고되고(관계 없다는 일본 측의 설명이 이후에 있었다) 효능이 별로 없다고 하여 미국 식품의약청(FDA)과 유럽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의 임상 연구 결과 동양 여성 중 비흡연자에게는 효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다시 심사가 진행 중이다. 암환자 중 비흡연자인 동양계 여성들의 경우 EGFR 유전자의 특정 부위에 돌연변이가 많고, 이레사는 이 특정 돌연변이에 잘 작용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맞춤 의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막대한 개발비를 들인 이레사와 같은 신약은 매우 비싸다. 확실한 효능이 있을지 불확실한 약을 투여하기 위해 말기 암환자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한 달에 600 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레사가 효능을 발휘할지 미리 유전자 검사를 하여 평가할 수 있다면 어떨까? 모든 사람들이 맞춤 의학의 수혜자가 되기에는 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맞춤 의료가 보편화되려면 적은 비용으로 유전자 검사가 가능해야 하는데, 이것이 아직 요원하다.
또한 이윤 극대화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제약업계에서 기껏 개발한 신약이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사태를 지켜보기만 할지도 의문이다. 미국처럼 보험회사들이 건강 보험을 담당하고 있는 한, 공공의 이익이 최고의 가치가 되기는 힘들다. 공공 보험의 축소, 민간 보험 회사와 제약업계의 결탁, 그와 맞물린 연구비 수혜 상황, 따라가지 못하는 보건 정책 때문에 자칫하면 맞춤 의학이 최상위 부유층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 과학의 진보가 인류에게 혜택이 되기 위해서 사회 보장 제도와 사회 각 부문의 모니터링 시스템이 함께 발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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