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워킹 맘은 일과 가정이라는 유리공을 양손에 쥐고 위태로운 저글링 묘기를 펼치는 곡예사들이다. 언제 어느 공이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잠시도 손을 멈추지 못한 채 두 개의 공을 좇아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살인적 업무 강도와 근무 시간,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야근과 휴일 근무, 심야의 회식과 술자리로 결속을 다지는 조직 문화속에서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일은 여성에게 초인적 희생과 인내를 요구한다.
알파 걸로 대표되는 여성 약진의 시대, 저출산은 한국 사회가 자초한 업보인 셈이다. 한국일보는 2010년을 저출산 문제 해결의 원년으로 삼아 일과 가정의 양립 방안을 모색하는 기획시리즈를 3부에 걸쳐 연재한다.
■ "둘째 아이는 곧 사직서죠"
"여섯 날 난 제 딸아이를 앉혀 놓고 그래요. 공부 너무 잘할 필요 없다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나오고, 의사 박사가 되면 뭐 해요? 한국에서 여자가 일과 가정을 병행한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얘긴데요."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김지혜(가명ㆍ36)씨는 22세이던 대학 4학년 때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했다. 이듬해 외환 위기 때문에 취업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대형 회계 법인에 취직했고, 이후 잘나가는 회계사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미국회계사(AICPA) 자격을 취득하고 회계학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김씨는 남녀평등 같은 구호는 굳이 입에 담을 필요도 없이 살아온 전형적 알파 걸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국 사회가 워킹 맘에게 종용하는 '일이냐, 아이냐'의 양자택일은 알파 걸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친정은 제주고, 시댁도 지방이었는데 핏덩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밤 12시 넘기기가 다반사인 회계 법인에 다니면서 양가 부모의 도움 없이 갓난아기를 키운다는 건 잔인한 농담이었다. 불가피한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과 고민을 거듭했고, 김씨는 결국 전업 주부로 전직했다.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직업이었다.
회계사도, 박사도 "답 없다, 답 없어"
어지간한 여풍(女風)은 이제 뉴스도 못 되는 눈부신 여성 약진의 사회. 하지만 이 여풍당당 시대에도 일과 가정의 양립에 실패해 가정으로 유턴하는 워킹 맘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2009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에 따르면 기혼 여성(20~44세)의 39.3%는 결혼 전후로 직장을 그만둔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첫 아이를 낳은 화학 박사 박소연(가명ㆍ35)씨는 유명 제약 회사 연구소의 개발팀에서 일하다 지난 가을 사직서를 냈다. 최신 트렌드와 기술을 결합해 화장품 신제품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던 그는 회사의 핵심 연구 인력이었다.
10년 가까이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고 어렵게 구한 직장이라 그만두기까지 맘 고생이 많았지만 시댁이나 친정 모두 아이를 봐 줄 수 없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었다.
"어린이집이니, 육아도우미니 말은 쉽죠. 돌도 안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아이들은 많은데 보육 교사는 적고, 위생 상태도 신뢰가 가지 않고…. 남들은 도우미 아주머니를 쓰라지만 어린 아기를 생판 모르는 남한테 맡길 수는 없었어요."10년 공부를 도루묵으로 만드는 사직서는 한국 사회에서 엄마가 되는 데 드는 막대한 모성 비용이었다.
'나쁜 엄마' 강요하는 한국 직장 문화
4세와 7세 아들을 둔 대기업 과장 이민정(가명ㆍ36)씨는 지난달 벼르고 벼르던 사표를 회사에 제출했다. 수석 입사에 인사 때마다 동기 중 가장 먼저 승진하며 유능하다고 인정받던 그였지만 아침마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 아이들을 밀치고 나오는 지옥 출근길을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었다.
"우는 애 달래다 보면 매일 지각이에요. 사탕을 줘 가며 달래다가 결국은 화를 내면서 애를 확 뿌리치고 나오죠. 아침마다 애 울음소리를 들으며 현관문을 닫고는 울면서 버스 타러 뛰어갔어요." 처음엔 "가지마"만 반복하던 둘째는 말이 늘면서 "엄마, 이렇게 가는 건 아니잖아" 하며 쓰러져 통곡했다.
회사에서의 일은 즐거웠다. 성취감도 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내야 하는 날들이 생겼다. 아이들은 한 명만 감기에 걸려도 금세 다른 애한테 옮겼고, 그럴 때면 더더욱 엄마를 찾았다. "아픈 애 둘을 집에 뉘여 놓고 나오면 회사에서도 집 생각뿐이죠. 그런 날 야근이나 회식까지 걸리면 나는 미칠 노릇인데 남들은 '애들은 원래 아프면서 커. 유별나게 굴지 마' 그래요."
휴가를 낼 때마다 평가는 안 좋아졌다. "애 엄마들은 맨날 애 아프다는 핑계"라는 직원들의 수군거림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唇?유지하자고 자리를 지키고 있자니 아픈 새끼 떼 놓고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화장실에서 몰래 운 적도 여러 번. 집에서는 출근 전쟁, 회사에서는 퇴근 전쟁, 총체적으로 인생이 전쟁이었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결국 나쁜 엄마, 냉혹한 엄마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이를 더 낳으라고요?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회에서요?"
서기 2010년, 워킹 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저출산 국가 대한민국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가슴속 사표 품은 엄마들… 아이 아플때 '나쁜 엄마' 죄책감도
한국 워킹 맘 10명 중 평균 7명은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둘 계획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막는 현재의 후진적 직장 문화와 정책들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여성 인력의 활용과 저출산 문제의 해결은 요원함을 보여 주는 결과다.
한국일보가 임신 출산 육아 포털 보령메디앙스아이맘과 워킹 맘 46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 대상의 69.5%(321명)가 '육아를 위해 언젠가 직장을 그만둘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사직 시기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가장 많았으며, '둘째 아이 출산 후' '2, 3세 무렵' 등이 뒤를 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질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은 39.2%가 '아이가 많이 아플 때'를 꼽았다. 이어 '아이의 정서적 안정이나 학업 성취도가 전업주부의 아이들보다 떨어질 때'가 37.2%로 2위였고 '야근이나 주말 근무 등 업무가 너무 많을 때'(9.7%) '상사나 동료 직원들이 눈치를 줄 때'(6.9%)가 다음이었다.
'나는 나쁜 엄마라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절반이 넘는 51.3%의 워킹 맘이 '아이가 많이 아플 때'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내 아이가 전업주부 아이들과 비교될 때'(25.8%) '직장 일에만 몰두해 있다고 느낄 때'(15.2%)가 다음이었다.
워킹 맘을 위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제도(복수 응답)로는 '근무시간 자율 조정'(367명) '사내 보육 시설'(356명) '양육비 일부 지원'(338명)을 꼽은 사람이 많았다.
그밖에 필요한 제도로는 ▦아이가 아플 때 의무적으로 쓸 수 있는 조퇴나 월차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도록 육아휴직 의무화 ▦낮 시간 밀도 있게 일하고 정시 퇴근하는 분위기 조성 ▦육아휴직 기간 연장(1년 유급ㆍ3년 무급) ▦실현성 없는 육아휴직 대신 출산휴가 6개월로 연장 등이 꼽혔다.
육아휴직을 사용한 경험이 있는 워킹 맘은 29.2%에 불과했다. '상사나 동료 직원들의 눈치가 보여서'(30.6%) '사용 이후 돌아올 불이익이 걱정돼'(23.1%) '경제적 부담 때문에'(20.1%) 등이 이유였다.
일과 가정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워킹 맘들의 힘겨운 상황은 심리적 및 신체적 고통으로 나타났다. '육아를 병행하고 나서 일만 할 때와 비교해 어떤 변화가 생겼냐'고 묻자 절반에 육박하는 45.2%가 '자주 우울하고 예민해지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답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남성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박탈감이 든다'는 응답이 21.4%로 뒤를 이었으며, '신체 특정 부위에 통증을 느낀다'는 응답도 11.7%나 됐다.
워킹 맘들은 직장에서 자신을 가장 배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자 상사(45.2%)를 꼽았다. 여자 상사가 16%로 2위였으며, 3위는 미혼 남성 동료(7.1%)보다 배나 많은 미혼 여성 동료(14.7%)였다. 기혼 남성 동료가 6.7%로 워킹맘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는 12월 24일부터 1월 8일까지 이메일 설문으로 실시됐으며, 95% 신뢰수준에 ±3.19% 포인트다.
■ 고학력여성 사회진출 급증불구 육아 '덫'… 재취업률 고졸이하보다 낮아
알파 걸 신드롬도 L자형 곡선을 바꾸지는 못했다.
2008년 대학 신입생의 46%, 2009년 석사 학위 취득자의 48%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직장을 그만둔 대졸 이상 고학력 여성의 대부분이 노동시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여성부가 2008년 12월 발간한 '경력 단절 여성의 취업 욕구 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해마다 상승하고 있지만 출산과 육아가 이뤄지는 30대 초반에 노동시장에서 퇴장했다가 육아가 마무리되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는 한국 특유의 M자형 경제활동 형태는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이 거의 발생하지 않아 여성의 고용률 곡선이 남성과 동일하게 20대부터 증가하다 노년기에 이르러 감소하는 종형 패턴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한국의 고학력 여성은 폭발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했음에도 20대 중반에 고용률이 가장 높았다가 결혼 출산과 함께 낮아져 다시 높아지지 않는 L자형 곡선을 수십 년째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고급인력의 유휴화가 심각한 실정이다.
고졸 이하 여성은 결혼 출산 후 소규모 업체의 단순ㆍ노무직 등에 하향 취업해 이전보다 오히려 높은 고용률을 맛甄?반면, 고학력 여성은 하향 취업을 감수하기보다 취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결혼 출산 후 재취업률이 고졸 이하 여성에 비해 현저히 낮다.
장서영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은 "국가적 인력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적으로 고학력 경력 단절 여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노동시장이 열리는 게 급선무"라며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한국의 직장 문화가 달라지지 않는 한 아이를 낳는 여성은 재취업하지 못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는 질곡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박선영기자
■ 해외 워킹맘들은/ 스웨덴, 풀-파트타임 '자유자재' 경력단절 없어
유럽 주요 국가들은 노동시간의 탄력적 조정을 통해 출산과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고 있다.
황수경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달 23일 여성가족패널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생애 단계별 여성의 시간 배분과 노동 공급'에 따르면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보편화한 맞벌이형'은 여성의 시장노동시간이 미취학 자녀가 있는 시기에는 줄어들었다가 자녀가 취학연령대에 들어가면 다시 늘어난다.
이들 국가에선 시장노동시간은 줄지만 경력 단절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파트 타임으로 육아기 여성의 고용을 유지하다가 육아가 어느 정도 끝나면 풀 타임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 별도의 파트 타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풀 타임으로 채용된 여성이 시기에 따라 풀 타임과 파트 타임을 자유롭게 오가는 형태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은 여성이 시장노동보다는 가사노동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국가로 대부분 파트 타임 형태로 여성 고용률을 지지하고 있다. 스웨덴보다는 여성고용률이 낮지만 전 생애에 걸쳐 여성의 경력 단절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유럽 국가 중 여성고용률이 다소 낮고 파트 타임 비중이 높은 편인 프랑스는 '약한 남성 부양자형' 모델에 속한다. 노동시장이 풀 타임 고용 위주로 돼 있어 미취학 자녀가 있는 상당수 여성들이 이 시기 노동시장에서 이탈, 고용률이 큰 폭으로 감소한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여성들의 노동시장 복귀가 어느 정도 이뤄진다.
전통적 성 역할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여성고용률이 유럽 국가 중 가장 낮고 육아기 여성의 노동시장 이탈도 현저하다.
가사 부담이 급증하는 시기에 풀 타임 고용과 노동시장 이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일단 이탈이 발생하면 복귀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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