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가 먼지 풀풀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 칼끝은 현 정부 들어 건건이 대립해 온 한국은행을 겨누고 있다.
지난 10년간 사문화되다시피 한 금융통화위원회 열석(列席=참석ㆍ배석과 비슷한 개념)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기준금리 결정 등을 위한 금통위 회의에 정부가 직접 참석해 발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법적으론 문제가 없지만,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안 해오던 일을 정부가 하겠다고 나섬에 따라 논란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정부와 한은간에 또다시 전운이 고조되면서 중앙은행 독립성 논란이 재연될 기세다.
기획재정부는 8일 개최되는 한은 금통위 회의를 시작으로 앞으로 재정부 차관이 정례적으로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라고 7일 밝혔다.
윤종원 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법적으로 보장된 금통위 열석발언권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것"이라며 "열흘 전 한은 측에 금통위 참석 의사를 통보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도 이날 필요 시 부위원장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측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1999년6월 이후 근 10년여만. 한국은행법 제91조는 재정부 차관 또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금통위 회의에 열석하여 발언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재정부 차관이 금통위에 참석한 것은 98~99년 단 4차례에 불과했다. 그것도 취임 상견례 등의 차원이었을 뿐, 금리정책에 영향을 줄만한 내용은 없었다.
현 정부 초기인 2008년4월 비록 여론 역풍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당시 최중경 차관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는 등 일찌감치부터 현 정부의 열석발언권 행사 의지는 확고했다.
정부가 내세우는 이유는 한은과의 정책공조 필요성. 윤 국장은 "이번 금융위기 대응 과정에서 가장 큰 교훈은 정책당국 간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정책공조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라며 "공조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금통위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한 관계자는 "정부가 법적 권리를 행사하겠다는데 뭐라 할 수 없다"면서도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낮은 일본, 영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진국에는 정부대표의 열석발언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구나 지금도 기획재정부장관과 한은총재, 금융위원장 등이 참석하는 '청와대 서별관회의'등을 통해 얼마든지 정책공조가 가능한 상황에서, 굳이 금통위 참석을 통해서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을 순수한 의도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한은 노조는 "정부의 중앙은행 장악 음모 신호탄으로 규정하고 철회시키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는 성명을 내고 8일 피켓 시위를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전문가들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은법이 열석발언권을 둔 것은 상시적이 아니라 중요한 협의가 필요할 때 사용하라고 만든 것"이라며 "만약 중앙은행과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면 금통위에 가서 열석발언 형태로 할 것이 아니라 다른 통로를 통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시장에서는 출구전략(금리인상) 시기를 두고 갈등이 증폭되는 시점에 열석발언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선 점에 대한 의구심이 쏟아진다. 결국은 한은의 조기 금리인상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는 얘기다.
한 증권사 채권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통화정책에 위쪽의 의중을 알린다는 점에서 한은의 독립성은 이미 깨진 것 아니냐"며 "결국 당분간 금리인상 기대를 접어야 된다는 신호로 봐야 된다"고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채권시장에서 지표물인 국고채 5년 금리가 0.1%포인트 떨어지는 등 주요 채권 금리가 급락세를 보인 것도 이런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물론 과민 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덕훈 전 금통위원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한은 금통위가 정부가 외압을 넣는다고 그대로 따를 정도의 위치는 아니라고 본다"며 "정부의 의견도 충분히 들어보고 결정을 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성남 민주당 의원(전 금통위원)도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금통위는 굉장히 독립적으로 운영이 되는 만큼 정부가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본다"면서 "단, 정부 입장 개진을 넘어 한은 독립성을 해하는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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