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슬그머니 고개 좀 들겠다. 언제부턴가 이 맘 때면 뼈저리게 확인하는 스스로의 무지에 잔뜩 움츠러들곤 했다. 도처에서 쏟아지는 사자성어들 태반이 도무지 해독불가인 때문이다. 올해도 그랬다. 공부가 본업인 교수님들이야 방기곡경(旁岐曲逕)이니, 강구연월(康衢煙月)이니 하며 잔뜩 목에 힘을 준들 그러려니 하면 될 터. 그런데 웬 취업 전문회사가 구직자들이 골랐다며 구지부득(求之不得), 구복지루(口腹之累)를 내놓아 당황케 하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한학과는 거리가 먼 청와대까지 나서 일로영일(一勞永逸)로 결정타를 먹였다.
▦일찍이 고사성어로 뭇 세인의 기를 죽인 건 JP였다. 특히 신군부의 강압 분위기에서 맞은 1980년 봄의 '춘래불사춘', 97년 마지막 재기를 준비하면서 '일에는 때가 있다'는 의미로 쓴 '줄탁동기'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평생 2인자답게 좌우명은 '물 흐르듯 산다'는 상선여수(上善如水)였다. 이게 근사해 보였는지 이후 정치인들마다 이 풍조에 가세했다. 올해는 더욱 유난해 현란한 사자성어들이 새해 벽두 여의도에 온통 넘실댔다. 글쎄, 평소에 보면 그렇게들 문자 속이 기특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 주변의 애먼 이들이 꽤나 고생했을 것 같다.
▦압축표현을 멋스럽게 여기는 건 한자문화권에선 공통이다. 함축과 여백이 있는 표의문자여서 더 그럴 것이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매년 사자성어 대신 '올해의 한자' 한 글자만을 선정한다. 대지진이 있던 해에는 진(震), 올림픽이 있는 해에는 금(金), 자살풍조가 사회문제가 된 해는 명(命),…이런 식이다. 한자를 병용하는 나라이므로 누구든 단번에 알아들을 만큼 쉽고 명쾌하다. 중국이야 제 나라 글자니 걱정할 일도 아니다. 일찌감치 온 국민을 한자문맹으로 만들어놓은 우리가 도리어 왜 이토록 난해한 한문용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교수들이 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도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처음 선정한 2001년엔 오리무중, 2002년 이합집산, 2003년 우왕좌왕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당동벌이(黨同伐異)부터 튀더니 이후 약팽소선(若烹小鮮), 호질기의(頀疾忌醫) 등으로 내달았다. 이건 공감을 배제한 지적 허세다. 올해 좋은 세상을 원한다면 강구연월보다 '이제 국민고생 끝!' 뜻의 고진감래쯤이 낫지 않았을까?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는 멸사봉공, 정치인들이라면 개과천선이나 환골탈태 정도가 좋을 뻔 했다. 어떤가, 어려운 한자 없이도 쉽게 와 닿지 않는지.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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