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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족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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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족탕 이야기

입력
2010.01.0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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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에 지인들과 만나 가족탕 이야기로 한참을 웃었다. 가족탕? 3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가족탕이란 게 있었다. 지금은 대형 찜질방이나 사우나에 밀려 사라졌지만 동네마다 자그마한 대중목욕탕이 있던 그 시절, 거기에는 남탕, 여탕과 별도로 가족탕이 있었다. 겨울에 온수 나오는 집도 드물었던 그 시절에, 가족탕은 한 가족이 오붓하게 가족애를 나누는 독립적인 공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지인이 그 가족탕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그때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6학년이 됐는데도 아버지가 가족탕을 가자고 해 너무도 싫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들과 함께 가족탕에 들어갔을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부끄러움을 알기 시작했을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떼써서 그때부터는 가족탕을 안 갔다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절을 떠올리며 세월의 변화를 절감했다. 기자는 그 이야기를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로 들었다. 가족탕이 사라진 건 부끄러움에 대한 우리의 생각, 기준이 달라졌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정초에 또 부끄러운 소식 하나를 접했다. 서울이 '세계 최악의 도시 톱 9' 가운데 3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세계 최대의 여행안내서 출판사인 '론리 플래닛'이 인터넷 사이트에 이 순위를 올렸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세계 최악의 도시'로 번역된 영어 원문은 'Cities you really hate', 직역하면 '당신이 진짜 혐오하는 도시들'쯤 되겠다. 1위는 미국의 디트로이트, 2위는 가나의 아크라, 3위가 서울이다. 4위는 미국의 LA, 이어서 영국의 울버햄튼,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인도의 첸나이, 탄자니아의 아류사, 멕시코의 체투말 등 이름도 낯선 도시들이 5~9위로 꼽혔다. 디트로이트는 '범죄와 오염이 심각하다', 아크라는 '혼란스럽고 추한 도시'라는 짧은 설명이 붙었다. 서울은? 론리 플래닛 사이트는 "한 코멘트에 따르면, 형편없이 무질서하게 뻗은 도로들과 소비에트 스타일의 콘크리트 아파트 빌딩들, 심각하게 오염됐고, 마음도 영혼도 없다. 숨막히는 단조로움이 사람들을 알코올중독으로 몰고 간다"고 9개 도시 중 가장 긴 설명을 달아놓았다.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이 손에 한 권씩은 들고 다닌다는 론리 플래닛이 어찌 서울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다시피 했을까. 궁금해져서 웹서핑을 계속한 끝에 의문은 풀렸다. 부지런한 한국의 네티즌들은 이미 그 전말을 추적해놓고 있었다. 거기 따르면 론리 플래닛 사이트에 이 순위가 오른 것은 이미 지난해 10월이고, 영국의 울버햄튼이 거명된 데 대해 BBC가 구랍 31일 뒤늦게 보도를 했으며, 1~9위의 리스팅이 특정한 기준을 갖고 세계의 도시들을 비교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서울에 대한 '코멘트'는 한 네티즌이 서울에 관해 쓴 댓글 하나를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 결국 이 순위 자체는 전혀 신뢰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부끄러움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저코멘트에 대고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 서울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서울은 여전히 부끄러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사람들의 가족탕 같은 공간은 아닐까. 엊그제 내린 폭설로 인한 난리법석도 그 한 모습이다. 다행히 서울은 변신을 꾀하고 있다. 올해 마침 서울은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돼 도시 이미지의 혁신을 노리고 있다. 한국일보는 '도시의 격을 높이자'를 2010년 10대 아젠다로 정하고 서울시와 공동기획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을 부끄러움을 아는, 도시다운 도시로 만들어나가자는 제안이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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