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일벗는 개개인 염기서열 차이… 생로병사 비밀에 한발더
2000년 6월 전 세계 게놈 연구자들의 시선은 미국으로 쏠렸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서열 총 30억쌍 가운데 27억쌍이 처음으로 발표됐기 때문이다. 이 초안은 1990년 출범한 '인간 게놈프로젝트'의 첫 성과였기에 더욱 이목을 끌었다.
최종 결실은 3년 뒤 이뤄졌다. 30억쌍의 염기서열이 모두 해독돼 만천하에 공개됐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이 데이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조각조각 해독된 적은 많았지만 이를 하나로 연결한 건 처음이었다. 나무는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정작 숲을 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깨끗이 해소됐다.
1000명 게놈 해독 박차
나무 대신 숲을 확인한 과학자들은 두 가지 점에 놀랐다. 하나는 30억쌍이나 되는 염기서열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몸 안에서 실제로 생리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이었다. 유전자가 생리적 기능을 나타내려면 염기서열 정보를 토대로 몸 안에서 단백질을 만들어내야 한다.
현재 단백질을 합성하는 염기서열은 전체의 1∼2%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 게놈이 모두 밝혀진 뒤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염기서열의 존재 이유를 규명하는데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다.
인간 게놈프로젝트의 첫 성과가 나온 2000년 당시만 해도 과학자들은 개인 간 염기서열 차이가 0.1%에 불과할 거라고 예상했다. 대부분의 염기서열이 비슷하니 일단 한 사람의 게놈을 해독해 놓으면 사람 유전자 기준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예상은 빗나갔다. 2004년 이후로 개인 간 염기서열 차이가 0.6% 이상이라는데 과학계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한 사람의 데이터만으로는 생로병사의 비밀을 풀기에 역부족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에 2008년 미국과 영국 주도로 '1000 게놈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각기 다른 인종 1,000명 정도는 분석을 해봐야 인간의 게놈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다. 이 프로젝트의 첫 성과로 백인과 흑인 각 3명의 게놈을 해독한 논문이 올 2월 말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과학자들도 국제학계의 이 같은 흐름에 뒤질세라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김종일 서울대 의대 교수는 "서울대 유전체의학연구소가 1000 게놈 프로젝트보다 먼저 한국인 남녀 각 5명의 게놈을 해독한 논문을 발표할 계획"이라며 "외국 과학자들이 제쳐둔 아시아인 게놈을 우리가 선점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국제 컨소시엄 적극 참여할 때"
인간 게놈 프로젝트 이후 과학계에는 이와 유사한 국제 컨소시엄이 여럿 구성됐다. 염기서열 데이터의 분량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개별 실험실 단위로 연구를 진행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체에 서식하면서 생체대사의 조절이나 각종 질병에 영향을 미치는 미생물의 게놈을 분석하는 '국제 인간 마이크로바이옴 컨소시엄'과 발생 과정이나 환경 변화에 따라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지를 밝히려는 '국제 인간 에피게놈 컨소시엄'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국내 게놈 연구는 아직 개별 실험실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학자들은 개별 연구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국제 컨소시엄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컨소시엄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하지 못하면 2년 이상 세계의 연구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제 인간 마이크로바이옴 컨소시엄에서 국가 차원의 연구계획이 없는 한국은 6월이면 배제될 위기에 처해 있다. 같은 달 본격 착수될 국제 에피게놈 컨소시엄에도 아직 정식 회원이 되지 못했다.
국제 에피게놈 컨소시엄에 기획멤버로 참여하고 있는 김영준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는 "게놈 분석은 앞으로 통계와 정보기술(IT)의 싸움이 될 것"이라며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니만큼 정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조언했다.
개별 연구를 아우르며 국제 컨소시엄 참여를 주도할만한 국가 차원의 게놈 연구기관이 없다는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수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김지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국의 게놈 연구도 이제 항공우주나 전자통신 분야처럼 거대과학으로 성장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동식물 게놈 해독 속속 신기원, 인류의 식량·의약 혁명 '눈앞'
식물 게놈 연구자들에게 2010년은 더 특별하다.
애기장대가 갖고 있는 2만 3,000개 유전자의 기능을 모두 밝히겠다며 10년 전 시작한 미국의 '2010 프로젝트'가 올해 완료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애기장대의 게놈은 2000년 이미 해독됐다.
이 프로젝트의 성과물은 애기장대를 비롯한 각종 식물의 유전자 기능 연구에 활용될 전망이다. 식물 게놈은 인류의 식량자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특히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농작물 게놈 가운데 환경 변화에 적응하거나 질병에 관련된 유전자는 생산량의 증감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최양도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는 "지난해까지 애기장대와 벼 포플러 옥수수 감자의 게놈이 모두 해독됐고, 고추와 배추 콩 토마토도 해독 완료를 눈앞에 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배추와 토마토 게놈 해독엔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식물은 자연계에서 동물보다 더 오래 진화해왔기 때문에 게놈 염기서열이 좀 더 복잡하다. 한 예로 비슷한 염기서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유전자 부위가 많다.
수많은 유전자 조각을 겹쳐 염기서열이 동일한 부위끼리 연결하며 퍼즐 맞추듯 전체 게놈을 해독하는 현재의 기술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식물에 비해 동물 게놈 해독은 비교적 빠른 편이다. 특히 말과 소 돼지 개처럼 인간과 가까운 동물은 대부분 해독이 거의 끝나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식용 가축의 게놈 데이터는 농작물처럼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각광 받는다.
지난해 11월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와 네이처는 각국 과학자 68명이 모여 척추동물 1만종의 게놈을 해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잇따라 전하기도 했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1,000만∼1억 달러로 예측됐다. 척추동물의 게놈 정보는 인류의 진화과정을 규명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다.
게놈 용량이 동식물의 100∼1,000배 작은 미생물은 해독이 가장 빠르다. 1,000종 이상의 게놈이 벌써 완전히 해독됐다고 학계에선 파악하고 있다.
지난해 대장균 4만 세대의 유전자를 분석해 발표한 김지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특히 산업현장에서 많이 쓰이는 미생물의 게놈 정보는 의약품이나 각종 소재물질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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