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까지도 연극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 연극이 예술에 대한 내 첫 사랑은 아니었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며 중학교때 부모님조차 모르게 한 예술고등학교에 지원했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응시한 나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날 나는 동네 개울가에 앉아 하루 종일 얼음을 깨며 나의 선택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고등학교 때는 글을 쓰는 작가를 꿈꿨다. 작가라면 혼자서라도 무엇이든 자기 안에 담긴 것들을 표출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극작가를 꿈꾸며 서울예술대학 방연과에 지원해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극을 접하면서 나는 글이 아닌 온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라는 것에 더욱 매력을 느꼈고, 결국 연극배우로서의 인생이 나의 길이라 굳게 믿고 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군입대 후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1년간 취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연극에 대한 강한 미련이었다. 결국 집안을 설득해 복학한 후 연극에 매달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첫 공연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도피하듯 도망을 쳤다. 너무도 좋아했던 일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자책감은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죄송한 마음에 당시 연출자 선생님을 찾은 적도 있었을 만큼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아물지 않고 남아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연극을 너무나 사랑해 그만큼 두려움도 컸다'라는 생각이 든다.
85년 내가 이상봉이란 브랜드로 처음 명동 제일백화점에 매장을 오픈했을 때 바로 옆 매장에는 연극배우였던 김금지 선생님의 구두매장이 있어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은 나에게 '이런 열정이면 당신은 언젠가 한 번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또 언젠가는 친하게 지내고 있는 가수 박미경과 클론의 구준엽, 강원래와 함께 한 자리에서 뮤지컬을 함께 하자며 결의했던 적도 있었는데, 강원래의 갑작스런 사고로 결국 그 계획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지난해 겨울 나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의 뮤지컬 의상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엔 내가 과연 정해진 기일 내에 시간을 쪼개 150벌에 달하는 그 많은 의상들을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상당히 망설여졌다. 선덕여왕>
결국 뮤지컬 선덕여왕의 총 연출을 맡고 있는 김승환 감독과 최종미 제작감독을 만나고 나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감 그리고 뮤지컬에 대한 열정은 내가 패션을 시작했을 때의 뜨거웠던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해주었다.
뮤지컬 <선덕여왕> 은 순수 국내 창작물로, 국내에서 창작 뮤지컬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선덕여왕>
현대의 오페라라 할 수 있는 뮤지컬은 방대한 스텝과 노래, 춤뿐만 아니라 탄탄한 구성과 감동적인 무대까지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국내 무대는 아직까지 미흡한 여건 탓에 창작보다는 직수입된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순수 창작 뮤지컬인 <선덕여왕> 의 의상제작은 디자이너로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선덕여왕>
지난 해 내 옷을 좋아하는 러시아 유명 가수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세계적인 연출가인 로만 빅투크(Roman Viktuk)감독을 통해 볼쇼이와 키로프 발레단의 의상제작소를 직접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마치 비행기 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처럼 철저한 보완시설을 거쳐 그 곳에 들어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잘 갖춰진 시스템과 오뜨꾸뛰르를 능가하는 섬세한 제작기술 등 한마디로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전통에 기초한 의상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번 뮤지컬<선덕여왕> 은 단순한 역사 드라마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 의상도 고증에만 기초하지 않는다. 자료도 많이 남아있지 않거니와, 오히려 이것이 나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다. 선덕여왕>
나는 시대적인 것보다는 미실과 덕만 공주 등 인물의 갈등 구도에 맞춰 디자인을 전개했다. 가령 선을 의미하는 덕만 공주의 색상이 화이트와 블루라면 미실의 색은 레드와 보라색으로 농염한 매력과 권력을 상징하도록 했다. 주요 인물의 의상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번 뮤지컬<선덕여왕> 의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의상은 화랑의 복장이었다. 선덕여왕>
전투복이 아닌 화려한 신라의 금관에서처럼 금의 나라 군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상상의 신라시대는 이처럼 나에게 더욱더 화려한 모습으?다가왔다. 여기에 무대엔 첨단의 LED모니터로 구성된 첨성대도 더해져 지금 가장 찬란한 문화라 할 수 있는 IT기술을 통해 화려했던 당시의 신라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두 달이 넘는 긴 작업을 마치고 드레스 리허설을 위해 나와 우리 스텝들은 제작된 의상을 들고 연습실을 방문했다. 거기서 뮤지컬<선덕여왕> 의 주요 장면들을 미리 볼 수 있었는데, 현장에서 울리는 배우들의 거친 몸짓과 매력적인 비트의 멜로디, 뮤지컬 <선덕여왕> 은 드라마와는 또 다른 뮤지컬만이 줄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선덕여왕> 선덕여왕>
연습실 밖 폭설과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목소리와 연기를 가다듬는 배우들의 열정 앞에서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배우의 꿈이 다시 한 번 물밀듯 밀려왔다.
배우는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된다. 자신의 무대를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의 예술. 그렇다면 나에게 뮤지컬 <선덕여왕> 은 30년의 기다림 끝에 내 꿈과 해후하게 만든 그런 인연을 선사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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