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너머 다양한 가족공동체의 울타리를 꿈꾸죠"
"가족 동의 없이는 수술을 못한다고요? 지금 우리가 같이 사는 가족이라니까요!"
추혜인(32)씨는 2006년 10월 서울 서대문구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추씨는 당시 한쪽 팔이 으스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유여원(27)씨 옆에서 발만 동동거릴 수밖에 없었다. 둘이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갔다가 유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서둘러 귀국했는데, 병원 측이 가족의 동의서가 없어 수술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던 것.
4년 넘게 유씨와 알고 지낸,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건만 추씨는 법적인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속수무책이었다. 유씨는 다음날 새벽 지방에서 올라온 남동생을 기다려 겨우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가족 바깥의 가족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난 추씨는 당시의 경험을 예로 들며 가족이면서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을 꺼냈다. 유씨도 "종신보험 하나를 붓고 있는데 내가 다치거나 죽었을 때 혈연 및 부부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친언니로 여기는 혜인씨에게 보험금 한 푼 줄 수 없어 아쉽다"고 거들었다.
유씨와 추씨는 벌써 5년째 한 집에서 살고 있는 '가족'이다. 이들이 사는 곳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 빌라 301호. 방 3개 중 나머지 한 방은 이 공간을 처음 마련한 30대 여성학자가 살고 있다.
3명의 여성들은 때로 함께 일하고, 때로 서로 의지하며 가족 이상의 가족을 꾸리고 살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가족을 꾸리지 못한 미혼(未婚) 또는 독신이라 부른다. 그 단어에 숨어있는 편견이 그토록 싫었던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를 '비혼(非婚)'여성이라 말한다. 그들이 사는 301호는 그러니까, 가부장제의 문제를 개선해 보려는 비혼 여성 공동체가 움트는 곳이다.
비혼은 단순히'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중립적 단어지만, '급진적'이라는 오해도 적지 않았다. 유씨는 "이 집에 머물렀던 사람 중 결혼해서 나간 사람도 있고,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떠난 사람도 있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으로서 다른 다양한 가족 형태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비혼 가족으로 살다 보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각종 세금공제 및 수당 혜택에서 제외되고 전세대출도 뒤로 밀리기 일쑤였죠."(유씨) 이리저리 알아보니 새로운 가족 공동체는 늘어나는데 이들을 보호할 장치는 전무하고 특히 홀로 사는 여성들이 사회안전망 바깥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더 큰 울타리를 꿈꾸며
이 같은 여성들을 위해 이들이 팔을 걷고 추진하고 있는 것이 비혼 여성들로 구성된 '의료생활협동조합'이다. 이미 다른 의료생협에서 일하고 있는 유씨와 가정의학과 레지던트인 추씨가 자신들의 전공을 살려서 의료비는 낮게 하고, 질병예방과 생활습관 개선 등 의료서비스를 손쉽게 제공받을 수 있는 생협을 구상한 것이다. 추씨는 "혼자 사는 이들에겐 갑자기 닥친 병마가 가장 큰 공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희망하는 '여성주의 의료생협'은 2012년 출범이 목표다. 지난해 1월 첫 모임을 가진 후 다달이 정기모임을 열어 조합원 모집과 출자금 모금에 나서고 있다. 혜택이 더 많은 자체 의료기관 설립도 고민 중이다. 국내엔 84곳의 의료생협이 있는데, 조합원이 300명 이상 돼야 설립이 가능하다.
조합원은 아직 12명밖에 없지만 꿈은 다부지다.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구심점, 안전장치가 되어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씨는 "조합원이 직접 설립하고 운영하며 생활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자는 뜻을 담은 생협은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비혼 가족을 비롯한 새로운 가족공동체와 닮았다"고 말했다. 추씨는 "나아가서는 기존 의료보건서비스에서 소외된 장애인, 노숙인도 끌어안는 게 목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들이 굳이 '여성주의'라고 내세운 건 현재 의료서비스 및 운영방식이 남성중심적이라는 판단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향하는 생협은 의료정보를 의사와 환자가 서로 나누는 한편, 금연 걷기 건강공부 등 예방적 생활치료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혼 가족은 기존의 가족 테두리를 넘어서 소외된 이들의 건강과 복지라는 커다란 울타리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비혼을 허하라'라는 그들의 외침이 전혀 이기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 늘어나는 '비혼' 운동가
'비혼'(非婚)은 일반인들에게 아직 낯선 말이지만, 여성학계는 혼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으로 미혼과 이혼 및 사별 상태를 포괄해 사용하고 있다. 각종 사회 복지 정책이 혼인 가정에만 집중돼 비혼자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 여성단체들의 지적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7년 12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25~54세 1인 비혼가구는 144만 가구. 연구원이 이들 중 1,204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이들이 혼자 살면서 겪는 어려움으로 '경제적 불안감'(34.3%)을 가장 많이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응급상황의 대처'(30.1%), '외로움'(19.5%) '노후 불안감'(7.6%) '가족압력ㆍ주위시선'(5.2%)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비혼자들이 이처럼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정부의 세제 및 주택정책 등에서도 홀대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민주택기금의 근로자ㆍ서민 전세자금 대출의 경우 기혼자는 5% 내외의 금리를 적용 받지만, 미혼자는 10%에 가까운 금리를 적용 받는다. 보금자리주택의 경우 비혼자들은 꿈도 꿀 수 없으며 연말 소득공제에서도 찬밥 신세다.
이 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비혼 운동을 벌이는 젊은 여성운동가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 여성단체가 '언니네트워크'다. 2004년 결성된 이 단체는 인터넷사이트를 중심으로 정보를 교류하는 한편 문화제, 세미나, 출판 등을 통해 비혼 여성의 문화를 넓혀가고 있다. 지난 해 6월에는 이곳 활동가들이 주축이 돼 비혼 여성의 삶을 풀어낸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 단체 사무국장 이김명란(26)씨는 "비혼 여성들이 집을 구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비혼백서'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올해는 한국 여성재단 지원을 받아 국내 곳곳에서 공동체를 꾸리고 살고 있는 비혼 여성들과의 교류도 시작할 계획이다.
김현수기자
■ 현장에서
● 비혼=비정상 고정관념 사라지는 계기 됐으면
사회는 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하다. 결혼 역시 사람들을 구분 짓는 대표적인 잣대다.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 전자의 경우 완성된 사회적 인격체로 평가 받는 반면 후자는 어딘가 하자 있는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비록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비혼 여성들은 이런 강요된 편견과 차별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비혼(非婚)이 단순히 결혼 반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 너머의 다양한 가족 공동체를 꿈꾼다. 그들에게 비혼은 '정상'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작업의 하나다. 돌봄과 연대라는 여성주의 가치를 접목시킨 여성주의 의료생협은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구심점이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더 큰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안으려는 비혼 여성들의 상상력이 현실로 승화되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기대해본다.
강윤주기자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취직을 했다고 하자 친척들이 대번 이런 질문을 했다. 동병상련이랄까. 비혼자들은 새로운 부담을 안게 된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화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존중했고 서로 의지하며 당당하게 살고 있었다. 비혼을 선택하는 것이 가족을 구성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일임을 강조했다. 기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 시대의 남녀 모두에게 짐이 되고 있는 현실은 이들의 외침을 그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게 만든다.
물론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비혼자의 증가가 가져올 문제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가족형태를 법적,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유럽국가의 출산률이 최근 다시 오르는 걸 보면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들과의 대화로 아직 미혼인 나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김현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