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국민은행장은 또 쓴 잔을 마셨다. KB금융지주회장을 향한 두 번의 도전과 두 번의 실패. 경선에서 졌던 1차 도전은 그렇다 해도, 이번엔 9부 능선(회장내정)까지 넘었지만 결국 정상 직전에서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강 행장으로선 2008년의 첫 실패도 뼈아픈 좌절이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지주사 CEO자리를 아무 연고도 없는 황영기씨에게 넘겨줬으니 그럴 법도 했겠다. 당시 은행권에선 "강 행장이 너무 방심했다"고들 얘기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2차 도전에선 강 행장도 전략을 바꿨다. 속전속결.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서두르지 말라'는 정부 쪽 메시지가 전달됐음에도 불구, 그는 회장선임절차를 조기 강행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는, 자칫 1차 때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강 행장의 속전속결 전략은 정부의 심기를 거슬렀고, 감독권을 앞세워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 속에 끝내 회장내정자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절차를 앞당긴 게 화근이었지만, 늦췄더라도 그가 회장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한 금융계 고위인사는 "지주회장은 아마도 강 행장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강 행장의 사퇴로 이번 사태는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의 운이 여기까지'란 식으로 끝낼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케이스는 우리나라 금융사에 '큰 얼룩'으로 기록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강 행장의 좌절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문제다. 그가 지주회장이 되든 안 되든, 이 역시도 큰 관심사는 아니다. 문제는 정부다. '당국의 뜻을 거스르면 누구도 온전할 수 없다'는 오랜 속설, 자유시장주의에 흠뻑 빠진 국내 금융권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불변의 철칙을 정부 스스로 보란 듯이 일깨워 준 것이다.
금융권에서 중도하차가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현 정부 출범 초 금융공기업CEO들이 임기 중 여럿 옷을 벗었다. 그때도 뒷말이 많았지만, 정부가 임면권을 쥔 공기업들이니까, 또 어쨌든 과거 정권에서 혜택을 받은 인사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갔다. 당국과 싸우다 물러난 이정환 전 한국거래소이사장 역시 공공기관장 신분인지라 그의 퇴진에 계속 시비를 걸기는 어려웠다. KB금융지주회장에서 낙마했던 황영기씨의 경우, 본인은 억울함이 많았지만 공적자금 투입은행장(우리은행장) 시절 투자손실이 문제됐기 때문에 논란이 더 확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KB금융지주는 다르다. 국책은행도, 공적자금 투입은행도 아니다. 정부가 인사문제에 결코 간여할 수 없는 순수민간금융그룹이다. 이것이 다른 중도퇴진 CEO들의 케이스와 다른 이유이자, 이번 사태를 주목해야 할 까닭이다.
물론 당국은 강 행장 사퇴의 도화선이 된 KB금융 조사가 '합법적 감독권 행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부가 법치(法治)라 말해도 이제 금융권은 관치(官治)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사실. 더구나 금융권엔 정부에 절대 순응해야 한다는, 일종의 공포감까지 생겨나고 있다.
과연 이게 올바른 금융의 모습일까. 해외시장과 외국인투자자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 선진ㆍ자율금융을 향하던 시계바늘이 몇 바퀴는 거꾸로 돌아간 느낌이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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