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량(降雨量)은 있고 적우량(積雨量)은 없다. 강설량(降雪量)은 없고 적설량(積雪量)만 있다. 고향 남쪽 바닷가엔 눈이 가끔 내리지만 쌓이지는 않았다. 강설은 있으되 적설은 없다는 얘기다. 강설이야 즐겁지만 적설은 위험하다. 3.3㎡(1평)에 10㎝ 정도의 눈이 쌓이면 보통 100㎏의 무게를 갖는다. 100평 크기 비닐하우스에 그만한 눈이 쌓이면 대형 승용차(3톤)가 지붕에 올라앉은 꼴이니 무너지지 않으면 이상하다. 2001년 강원 속초 일부의 적설량이 100㎝였는데, 승용차 지붕(1평 남짓)에 1톤 넘는 짐이 실렸으니 찌그러지기도 했겠다.
▦쌓인 눈이라고 천적이 없을 수 없다. 염화칼슘(CaCl2)이다. 습기를 흡수하는 데 영하 55도(자신의 응고점)에 미치지 못하는 눈을 자기 체중의 15배까지 빨아먹는다. 고체인 눈가루를 액체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열이 생겨 주변을 녹이니 일석이조의 제설제다. 응고점이 영하 21도인 소금(염화나트륨ㆍNaCl)도 제설제로 쓰이지만 영하 20도보다 추운 곳에선 효과가 적다. 극한 지역인 캐나다와 일본 홋카이도 등에선 염화칼슘이나 유사한 성능의 염화마그네슘(MgCl2)을 사용한다. 보통 지역에선 상대적으로 값이 싼 소금을 염화칼슘에 섞어 뿌린다.
▦미끄럼을 막는 염화칼슘이 오히려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안전하리라 믿는 방심 때문이다. ①보통 마른 길 ②비올 때 ③염화칼슘 뿌린 뒤 ④눈 길(적설량 2㎝)의 4가지 경우 제동거리를 분석한 교통안전연구소 자료가 있다. ①의 제동거리가 100m(시속 100㎞ 경우 평균치)라면, ②의 경우 143m, ③의 경우 150m, ④의 경우 167m로 나타났다. 염화칼슘을 충분히 뿌렸다 하더라도 봄 여름 빗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남은 염화칼슘은 공기 중 습기를 계속 빨아들여 눈이 없어져도 2~3일 동안은 '비 올 때' 상태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속도다. 자동차가 10% 감속하면 20% 이상 제동거리가 줄어드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됐지만 걸음걸이도 마찬가지다. 염화칼슘이 자신의 15배 이상의 눈을 먹어 치운다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인간 염화칼슘'이라는 농담처럼 각자가 집 주변을 잘 치우는 성실한 일상이 최선일 게다. 새해 들어 폭설이 내리고, 준비됐던 염화칼슘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된 의미는 그저 자동차든 사람이든 괜히 서두르지 말고 어려운 곳을 잘 살피면서 천천히 다니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고 싶다.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말처럼.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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