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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27> 격렬한 노동쟁의 수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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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27> 격렬한 노동쟁의 수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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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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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노태우 정부의 출범과 함께 당장 대처해야 할 경제현안은 노사문제와 대외개방정책의 추진이었다.

민주화에 따라 규제가 풀리고 국민욕구가 분출하면서 격렬한 노사분규가 뒤따랐다. 특히 1987년 6.10항쟁이 있은 뒤 11월의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노조설립과 운영이 대폭 자율화되면서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쟁의는 폭발적으로 증가 하였다. 노동조합원 수는 1986년의 103만 명에서 88년에는 171만으로, 노동조합 수는 2,675개에서 6,164개로 급증하였다.

노사분규 건수를 보면 1986년까지 매년 300건 미만이었으나 87-89의 3년 동안에는 연 평균 2,400건으로 급증했다가 90년 이후에는 다시 300건 이하로 하락하여 노사분규가 88년 전후에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 동안의 노동조합 운동은 주로 제조업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이 때를 계기로 금융 운수 건설 병원 학교 공공기관 등 서비스업으로 번져나갔다. 노조의 요구사항도 기업 경영이나 인사에까지 관여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분규의 양태도 경영책임자를 감금하거나 폭행하는 과격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사분규는 철도청 서울지하철 국책연구기관 등 공공기관으로 번져나갔다. 특히 철도청과 서울지하철의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철도청 기관사들은 88년 7월 하순부터 서울 부산 순천 등 7개 사업장에서 농성하면서 전면파업을 예고하고 있었으며 서울지하철 노조도 파업에 돌입하기 위해 농성에 돌입하고 있었다.

두 기관의 파업은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막중한 것이어서 결코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이처럼 큰 문제에는 안기부(현재의 국가정보원)를 포함한 범정부적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관계부처에서는 청와대의 협조를 희망했는데 대통령은 청남대에 휴가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개입해야 할 특수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당시 노동부 및 철도청과 협의한 끝에 차관급 관계관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반을 구성했다. 이 회의에는 철도청장과 노동·교통·문화공보부 등 관계부처 차관, 서울시 부시장, 대검 차장, 조종석 치안본부장(국회의원ㆍ작고)과 이상연 안기부 차장(내무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7월24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이 날도 청와대 옆에 있었던 안가에서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철도파업만은 막아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지만 파업을 막기 위해 농성장에 사전 공권력을 투입하지는 않기로 했다. 철도청으로 하여금 최대한 노조요구를 수용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노사협의를 진행하되 경영이나 인사에 노조가 개입하는 일은 절대 허용해서 안 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 방침에 따라 즉시 노사협의를 재개토록 하였다.

그런데 7월26일 새벽 1시20분, 철도청 기관사들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여 모든 철도교통이 정지되었다는 철도청장의 전화가 왔다. 나는 즉시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바로 갈현동의 집을 나섰다. 회의 결과 이 파업은 명백한 불법일 뿐 아니라 교통대란이라는 사안의 긴박성에 비추어 공권력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를 즉시 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얻고 오후 2시 치안 본부장으로 하여금 농성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도록 했다.

농성은 즉시 해산되고 기차는 다시 움직였다. 철도운행률은 26일에는 10%에 불과했으나 다음날은 30%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완전 정상화 했다. 이로서 철도파업은 막을 내리고 그 영향을 받아 파업을 예고하고 농성 중이던 서울 지하철 노조는 자진해서 농성을 풀어 우려했던 교통대란은 일단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과격한 노사분규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노태우 대통령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를 불러 치하해 주셨다.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들과 가끔 저녁을 같이 하면서 자유롭게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는데 술이라도 몇 잔 드시면 '베사메무초'를 즐겨 불렀다.

노래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군 출신이지만 인간미가 있고 성품이 따뜻하여 모진 일을 하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래서 물태우 란 말도 듣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 서둘러 추진했던 또 다른 정책은 대외개방이었다. 당시의 대외환경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모든 대륙이 자유무역 협정을 확대하고 다자간의 무역협상은 모든 나라에 상품뿐 아니라 서비스와 자본까지도 개방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무역흑자가 쌓여서 이것이 통화팽창과 인플레 압력으로 작용하여 경제안정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무역수지는 1985년까지 적자였으나 86년부터는 4년 동안 모두280억 달러의 흑자가 누적되었다. 그리하여 경제개방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였다.

그리하여 나는 대통령께 과감한 경제개방정책을 건의했는데 흔쾌히 수락하시고 부총리와 협의 하여 적극 추진하라 하셨다. 그래서 나웅배 부총리를 중심으로 경제개방정책이 일관되게 집행되었던 것이다.

88년 중 수 차례에 걸쳐 수입관세 인하와 수입품 특별소비세 인하, 민간의 해외부동산취득과 외화보유 허용, 외국인의 주식투자 확대와 자본시장의 단계적 개방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88년 11월1일에는 우리나라가 IMF 8조국으로 이행하여 경상거래상의 지급제한이 철폐되어 경상거래가 자유화 되었다. 나는 개방조치의 단계마다 이를 대통령께 보고드리고 후속조치에 대해 협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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