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밤
최수진
지리산에 밤이 왔어요
엄마가 빨래 걷는 것을 깜빡 잊었어요
다람쥐 오소리 곰 멧돼지 산토끼 아기들이
엄마 몰래 마을에 내려와
빨랫줄에 걸린 옷을 하나씩 입었어요
토끼는 귀에 아빠 양말을 하나 걸치고
아기곰은 내 팬티를 입었어요
오소리는 누나의 보들보들한 블라우스를 입고
다람쥐는 엄마 모자를 꼬리에 걸치고
아기멧돼지는 할머니 통치마를 입었어요
서로 쳐다보며 하하하하 웃었어요
아기동물들을 혼내지 마세요
빨랫줄에 앉은 아기새는 모른 척
웃고만 있었어요
■ 당선소감 "지리산 아기동물들이 보내준 선물"
저는 걸음이 느립니다. 친구들은 항상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저만치 뒤따라오는 저더러 느림보라고 놀립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들보다 더 많은 것을 봅니다. 길에 핀 꽃과 나무와 다람쥐와 나비와 풀벌레와 새, 걸음이 느려야만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리산에는 동물들이 많습니다. 아기젓가락만한 개구쟁이 초록뱀이 있고, 뻔뻔하지만 겁이 많은 줄무늬 산고양이가 졸고 있습니다. 밤에 엄마를 찾아 우는 덩치만 큰 아기곰도 있고, 가끔 놀러오는 날라리 아기다람쥐도 있습니다. 불빛 아래 정신없이 춤을 추다가 방충망에 붙어 쉬는 나방이랑 곤충들까지 모두 다 제 친구들입니다.
아기동물들과 어린이들과 저는 모두 한 팀입니다. 어른들은 저더러 아이들과 수준이 딱 맞다 놀리시지만 저는 어린이들과 노는 일이 재밌습니다. 그 속에 있으면 어른이기를 강요받지 않아 즐겁습니다. 제게 있어 동물들과 어린이들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공감하는 존재입니다. 길을 지나갈 때나 생활 어디에서든 어린이들을 보면 그 나이 때 저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제게도 지리산 산타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받아본 선물 중에 가장 기쁜 선물입니다. 참 오랜만에 받아보는 선물입니다.
심사위원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기회를 주신 한국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이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지리산 동물들과 어린이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수진
■ 인터뷰- "삽화 직접 그린 동시집 내고 싶어"
찬 바람이 불면 문학병이 도져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낙선하고 좌절하고, 또 도전하고 좌절하고 다시 시도한 끝에 등단한 기성 작가들의 신춘문예 도전기는 들을 때마다 눈물겹다.
최수진(26ㆍ본명 김수진)씨는 첫 도전에 당선의 영광을 얻은 행운아다. 그의 행운은 그러나 오랜 시련 끝에 찾아왔다. 고교와 대학 입시는 물론 온갖 경시대회에서 늘 낙방의 고배를 마셔 "거의 쓰러져 있었다" 고 한다. 그는 "아예 기대를 안 했는데 이제야 운이 트이는 것 같아요" 라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당선작은 방학이면 머물던 경남 사천시 곤명면, 지리산 자락의 시골집 체험이 바탕이 됐다. "3년 전 어느 아침 빨랫줄 위에 하얀 서리가 내린 채 걸려있는 빨래들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전날 밤 들었던 개, 멧돼지 같은 동물 울음소리를 떠올렸죠. 산짐승들이 한 번씩 빨래들을 입어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메모를 남겨뒀지요."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과 거리가 멀지만 문학에 대한 꿈은 중고교 시절부터 이미 품고 있었다. "파스텔이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 뒤 옆에 메모를 하는 버릇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동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을 부모님 덕으로 돌렸다. "늘 제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좀 철없는 일을 해도 다른 말씀이 없으셨죠. 제가 아이들의 마음에 잘 공감할 수 있다면 그 덕분이겠지요."
"꼭 어떤 책을 읽기보다는 활자로 된 것에는 다 흥미가 있다" 는 그의 독서체험은 종횡무진이다. "읽고 읽고 하다보면 무언가 연결고리가 생기고, 그런 두루뭉술한 생각들이 마음의 형태가 되어 눈이 되기도 하고 비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고 그는 말했다. "가끔 서점에 가서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고민을 할까 옆에서 유심히 지켜봅니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이의 마음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동시에 삽화도 직접 그린 동시집을 내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 심사평-자신만의 동시 세계를 열어갈 가능성 엿보여
올해 응모된 826편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나 시적 표현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최종 4편을 가려냈다. 최수영의 '아이스크림 저울' , 문현식의 '늦은 후회' , 김병욱의 '지렁이 못' , 최수진의 '지리산의 밤' 이 그것이다.
우선 '아이스크림 저울' 은 생동감 있는 어린이의 마음을 잘 붙잡은 시다. 그러나 다루고 있는 세계가 소소한 일상에 그치고 있는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늦은 후회' 역시 작품 속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나, 시가 지나치게 산문화되어 있는 점이 한계로 여겨졌다. 제목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좀 더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지렁이 못' 은 사물에 대해 새로운 환기를 일으키는 힘을 가진 작품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고 그것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당선작과 끝까지 겨루어 볼 만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다소 평이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리산의 밤' 은 동화적 상상의 세계를 시적 언어로 정감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꿈과 현실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그 둘을 자연스레 연결지어 공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실감의 세계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함께 보내온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동시 세계를 열어갈 가능성이 엿보여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리는 데 합의했다. 더욱 정진하여 우리 동시단을 빛내는 재목이 되길 바란다.
● 심사위원=정호승(시인) 김제곤(아동문학비평가ㆍ인천 삼산초 교사)
송정근기자 zoo52@hk.co.kr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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