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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가상 소설 아침에 떠난 수상(首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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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가상 소설 아침에 떠난 수상(首相)

입력
2010.01.0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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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순화궁을 떠난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삼베로 짠 중절모를 쓴 이완용이 앞장 섰고, 그 뒤를 농상공부대신인 조중웅과 대한신문 사장인 이인직이 따랐다.

팔월 초순의 아침은, 매미의 그악스러운 울음소리와 이따금씩 훅 불어오는 더운 바람 때문에 한결 더 후텁지근하게 느껴졌고, 또 한편으론 어떤 조바심 같은 것이 눅진한 공기 속에 뒤섞여 있는 듯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들 세 사람의 등은 축축하게 변해버렸다.

이인직이 다시 한 번 이완용의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_ 수상 각하, 아무리 그래도 그 몸으론…. 예서 용산까지도 족히 십 리길인데 인력거라도 부르심이….

그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차마 수상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한 채 말했다. 지난 겨울 흉한의 습격으로 등과 배를 난자당한 이후, 수상은 허리를 곧추 펴지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지도 못했다. 온양에서 몇 달 요양을 했다지만, 요 근래까지도 통증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이 잦은 모양이었다. 이인직은 그것이 단순히 칼에 베인 상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칼날이 수상의 사위에서, 수상의 목을 향해 조금씩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_ 앞으로 갈 길이 천 리길인데, 십 리길도 못 가면 어찌 쓰나? 요란 떨 일 없네.

수상은 중절모를 쓴 머리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이인직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 했지만, 조중웅이 그의 팔을 잡았다. 조중웅은 그와 눈을 맞춘 후,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십 년 지기인 그들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서로가 하려는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놔두세, 그냥, 가만히….

사흘 전 늦은 밤, 이인직은 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츠 미도리의 자택을 은밀히 방문했다. 우연을 가장한 방문이었지만, 실은 수상의 지시를 받고 찾아간 길이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상의 조력자였던 이토 통감이 안중근에 의해 저격당하고, 후임 통감이었던 소네마저 위암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니, 송병준의 일진회 쪽 움직임이 더욱더 부산해졌던 것이다. 현 내각을 모두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대신에 오를 것이라 장담하고 다니던 송병준은, 기어이 한 발 앞서 '한일합방론'을 일본 내각에 건의하였다.

사실상 선수를 친 셈이었다. 당시, 이완용 수상 아래 현 내각 또한 '합방론' 건의에 대한 의견을 은밀히 조율중에 있었다. 의견은 모두 모아졌으나, 다만 모양새가 문제였다. 한 나라의 내각 수장이 자신의 나라와 임금을 통째로 들어 타국에 바치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송병준이 먼저 치고 나갔고, 신임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또한 일진회 쪽과 손을 맞잡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이래저래 좌불안석의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송병준이 권력을 잡는 날이 온다면, 수상도, 내각대신들도, 그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날 밤, 이인직의 임무는 통감부 외사국장이자 한때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고마츠를 만나, 신임 통감의 의중을 캐보는 것이었다. 은근슬쩍 현 내각 또한 '합방론'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치라는 것 역시 수상의 주문이었다.

맥주와 조선요리를 앞에 두고 마주앉은 고마츠는, 그러나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되레 이인직을 통해 수상의 속내를 캐보려는 듯, 자꾸 송병준의 이름을 꺼냈다.

_ 도쿄에 있는 송병준이 자꾸 경성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뭐 그렇다고 우리 데라우치 통감이 쉽게 허락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용렬한 분은 아니시니깐요.

고마츠의 말대로 테라우치 신임 통감은 용렬하고 치졸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대신 그는 군인답게 용맹할 것이다. 용맹하게, 거침없이 한일병합을 이뤄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자들은 모두 제거해나갈 것이다…. 이인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차가운 맥주를 들이켰다.

수상을 존중하고, 수상에게 예를 갖추었던 통감들은, 이제 모두 전 시대의 인물들이 되고 말았다. 남은 건 딱 하나, 굴종, 굴종뿐이었다. 그렇다면 협상도, 의중도, 모두 헛된 것이 아닐까? 이미 통감부의 계획은 완성되고 진행되고 있을 터인데….

_ 그대가 이 수상의 심복이어서 믿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 데라우치 통감은 수상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수상은 한국의 황제 문제 때문에 고민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거라면 염려마십시오. 일한 병합이 된다 해도 한국의 황제는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태평한 경지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천황 폐하께선 한국의 황제를 황태자 다음인 친왕 위에 놓으실 뜻을 갖고 계십니다.

고마츠는 담배를 한 대 물며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나, 고마츠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 수상의 염려는 한국의 황제가 아니었다. 현 내각이 지속되느냐 마느냐, 송병준이 입성을 하느냐 마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이토 아래에서 정치를 배운 고마츠는 그 문제에 대해선 확답을 주지 않았다. 두 개의 패를 끝까지 쥐고 있겠다는 계산일 터. 그러니, 이인직으로선 더 이상 물어볼 말도, 확인해야 할 사항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부질없이 맥주만 계속 축낼 뿐.

_ 상해로 가세나.

고마츠와의 면담 내용을 전해들은 이 수상은 무덤덤하게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수상의 말에 조중웅과 이인직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상해라니, 그럼 모든 걸 다 버리고 망명을 하자는 말이 아니던가. 송병준이 입성하기도 전에 그의 자리를 내어주자는 말이 아니던가.

_ 수상 각하. 그 어찌….

조중웅이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이인직은 계속 말없이 자신의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여지없는 패배요, 너무나도 허무한 항복선언이었다. 누구보다 용의주도하고, 또 그 누구보다 사리에 밝은 수상이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_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약한 모습을 보이십니까?

조중웅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수상은 뜻밖에도, 슬쩍 미소를 흘렸다.

_ 그래서 자네들이 아직 부족하다는 거야. 모름지기 정치가라면 말일세, 어느 때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지, 그걸 감을 익혀야 하는 법인데, 쯧쯧….

그러면서 수상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상해로 떠나면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데라우치 통감과 송병준일 것이다, 일본 천황이 그동안 합방을 주저했던 까닭은 민심의 동요 탓이었다, 현직 군인인 데라우치를 통감으로 임명한 것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민란을 사전에 제압하고자 함이리라, 합방 때문에 민란이 일어났다고 하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러시아에게 일본은 약점을 잡히게 될 것이다, 한데 내가 만약 상해로 떠나면 어찌될 것 같은가? 데라우치가 송병준과 합방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거 같나? 민심은 가만히 있을 거 같나? 수상이 합방을 반대해서 망명했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영국이나 미국이나 러시아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거 같나…?

수상의 긴 설명을 듣는 동안 이인직과 조중웅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수상은 지금이 곧 자신의 승부수를 띄울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상해로 가는 동안, 통감부에서 그들을 쫓아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숙일 것이다, 현 내각의 위치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상의 계산은 바로 거기까지였다.

수상과 그 일행은 용산에서 신의주행 열차를 탈 작정이었다. 통감부의 눈치가 빠르다면 열차를 타기 전, 그들은 신임 통감과 면담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상이 일부러 사람들이 번잡한 아침 나절, 용산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었다.

용산역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할 즈음, 이인직이 다시 물었다.

_ 통감부에서 잡지 않으면… 그땐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럼 정말 모든 걸 다 잃는 셈인데….

수상이 중절모를 벗어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슬쩍,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_ 그러면 합방도 물 건너가는 거겠지. 걱정말게, 이 사람아. 우리에겐 미국이, 또 러시아가 있지 않는가? 그 사람들도 내가 잘 알아.

수상은 툭툭, 두어 번 이인직의 어깨를 두들겨주곤,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이었다.

이기호(소설가ㆍ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 한일 강제병합 그때 이랬다면…

'아침에 떠난 수상'은 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10년, 친일파의 두 거두였던 이완용과 송병준이 벌인 권력 게임을 소재로 한 가상 소설이다.

일진회를 이끌던 송병준은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보를 거듭했지만, 당시 내각 수상이던 이완용은 겉으로는 합방론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송병준에게 권력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이완용은 8월 10일 밤 심복인 이인직을 몰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 미도리에게 보내 합방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달한 뒤 합방 후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는 거래를 추진했다.

이완용 내각을 사퇴시킨 뒤 합방조약을 체결할 경우 예상되는 민심 동요를 우려한 일본측도 이를 묵인했고, 이인직_미도리 밀담 12일 만인 8월 22일 전격적으로 병합조약이 체결됐다.

당시 이완용은 내각이 교체되는 경우에 대비해 중국 상하이로 도주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랬을 경우 민심의 동요 때문에 한일 강제병합은 상당 기간 지연됐을 것이며, 다른 열강들에 의해 견제받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정이다.

자신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어떤 권력과도 결탁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완용, 일본에 대한 충성 경쟁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던 송병준의 작태는 한국 역사를 수렁에 빠트린 권력지향적 기회주의자들의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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