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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춘문예/ 시 - 검은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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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춘문예/ 시 - 검은 구두

입력
2010.01.0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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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두

김성태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 당선소감 "눈물의 마운드에 섰다… 나는 아직 2군이다"

홈런을 치지 못한 예비 시인들이 흘림체로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미안하다. 그 어느 날을 위해 그 어느 날은 패전투수처럼 연필을 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뜨끈뜨끈한 눈물의 마운드에 서있다. 심사위원 선생님이 선발등판을 허락해주셨다. 관중석 한 구석에서 나를 응원하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 이름은 김재숙, 어머니다. 보희 누나와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모자를 벗는다. 고개를 숙여 감사드린다.

대형서점에서 시집은 다섯 평의 영토만 갖는다. 식민지적 삶이라고 해도, 나는 시를 떠나 살 수 없다. 내 피는 C(詩)형이고 종이는 피부이기에 서걱거리는 연필을 놓을 수가 없다. 노트를 넘길 때마다 밤바다 소리가 들린다. 검은 모래사장 흰 고래처럼 갸릉갸릉 심연에 쌓여있는 언어를 불러본다. 단어 하나를 잃을까 봐 공포에 떨기를 여러 번, 처절하게 시를 썼고 홀로 외로워했다. 남루해지는 얼굴을 보고 슬펐다면 가난해지는 시를 보고는 분노했다. 이렇게 내가 시인이 되었다. 문학하는 당신이 나를 찾아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시는 간절함이다. 짝사랑하는 마음은 문장을 슬프게 만들고, 대상을 그립게 만들고, 행동을 재촉하게 만든다. 타고난 무엇도 절박한 무엇을 이기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아직 나는 2군이다. 오늘도 헛스윙이다. 다시 주저앉아 조용히 시를 써야 한다. 진정 왜 시를 쓰는가. 초 단위로 담뱃불이 명멸한다. 내 등은 내가 볼 수 없는 자리다. 시인으로서 내 뒷모습이 슬프지만 아름답게 그려졌으면 좋겠다.

■ 인터뷰 "행과 행 사이에 울림이 있는 시 쓰렵니다"

"당선도 당선이지만 저만의 시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김성태(24)씨에게 시가 '들어온'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사귀어왔던 절친한 친구를 사고로 막 잃고 나서다. 접신(接神)의 시간처럼 가을 내내 시를 쓰며 그 허무함과 절망감을 달랬다. 당선작은 그 친구의 장례식에 가서 마구 뒤섞여 있는 구두들을 보며 착상한 시다. '구두에는 계급이 없구나. 구두는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의 흔적을 보여주는구나'라는 생각에서 시는 출발했다.

김씨는 기성 시인들의 지도를 받지도, 시인 지망생들의 합평 모임에 참석하지도, 문학아카데미에서 공부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혼자서 습작기를 보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라서 시인들로부터 조언을 받을까 하기도 했지만, 시 쓰는 기술보다는 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머리맡에 시집을 두고 틈만 나면 시를 쓰고 지우며 스스로를 연단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좌우명"이라는 그는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포스트잇에 메모를 하는 버릇이 있는데, 방 한쪽 벽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돼 있다고 한다.

시만큼이나 연극을 좋아하는 취향과 무관하지 않게, 그의 시에는 '이야기'가 있다.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지난해에만 70편 이상의 연극과 뮤지컬을 봤고 희곡도 100편 이상 읽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의 촉수를 뻗치고 있는 그는 환한 하늘과 어두운 집, 하늘을 나는 신사 등 이질적 풍경 속에 대상을 배치해 상상을 자극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니체의 <비극의 탄생> 을 읽다가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없다'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는 그는 "이 구절이 무서운 성찰 없이 울림 있는 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며 "행과 행, 문장과 문장 사이에 울림이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 심사평/ 일상의 관찰력·꿰맨 자국 없는 표현 미덕

심사자들은 응모작을 셋으로 나눠 예심을 본 후에 올린 20편의 작품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정움의 '실종', 이정현의 '빗살무늬토기의 냄새', 김성태(필명 김아타)의 '검은 구두' 등 3편이었다.

'실종'은 산악 등반을 소재로 하여 극한상황의 고통을 담담하게 성찰한 수작이다. '주인 없는 발자국도 신앙'인 고지대, '짐승의 몸을 가진 바람', 사방에서 채찍을 휘둘러오는 길 등과 같은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작고 나약한 육체에서 꺼낸 의지를 대비적으로 실감나게 드러냈다. 감정을 잘 통제하면서 종교적인 경지가 느껴질 정도로 강한 극기의 사유를 관념과 감각을 조화시켜 그린 점이 돋보였다.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신석기 사내가 비와 흙과 하늘로 빗살무늬토기를 빚는 과정을 상상한 시다. 오랫동안 보아서 사내의 몸에 충분히 육화된 빗줄기를 흙에 넣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빗살무늬 속에 내재된 기억의 원형을 현대인인 화자의 시점에서 읽어내고 신석기와 현대의 시공간을 빗줄기와 흙 속의 냄새로 결합시키는 상상력이 특히 볼 만하였다.

'검은 구두'는 쉽고 평이해 보이지만 구두를 통해 삶을 관통하는 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방법은 결코 평이하지 않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 일상의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관찰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꿰맨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표현과 그것에 잘 어울리는 유머러스한 어조도 이 시의 미덕인데, 그것은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오랫동안 육화되었다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으나, 아쉽게도 두 작품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종'은 시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여 전체적으로 부자유스럽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같이 논의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에 반해 '검은 구두'는 삶에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고, 작은 것 속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발상도 참신하여,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길 기대한다. 끝까지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매머드 뼈'(김영각)와 '프로필'(기리나)도 매력적인 개성을 지닌 가작이었음을 밝힌다. 용기를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이시영(시인·단국대 초빙교수), 김기택(시인)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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