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0대나 20대는 20세기가 저물 무렵에 태어났다.
이들에게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경험은 과거사의 퇴적층 깊숙이 존재한다. 식민주의의 흔적은 캐내거나 보듬어야 할 당대의 현실이 아니라, 역사 교과서 속에 형광펜으로 줄을 긋는 연대기로 의미가 있다.
한 제약회사의 광고 카피처럼 "태어나서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것이지만 "임금님도 마셨다던" 오래된 소화제와 같은 존재감.
그런 인식은 '피해자'로서 역사를 배운 한국의 젊은이나, '가해자'의 책임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일본의 젊은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일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양국의 20대로부터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세세히 주제를 정해두지 않고 정치적 관심부터 서로의 문화에 대한 호감, 취업에 대한 고민 등을 편안히 주고받는 자리였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 퇴영적인 토론보다는 서로의 속내를 꾸밈없이 들춰 보여주는 것이 미래지향적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당위보다 소통이 아직 남아 있는 식민의 매듭을 끊는 칼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대화는 지난달 16일 한국일보사에서 진행됐고 사회는 한영혜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국제대학원 교수)이 맡았다.
● 좌담 참석자
한영혜 (54·서울대 일본연구소장·국제대학원 교수·사회)
사사노 미사에 (30·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 석사과정)
타부치 타카아키 (26·동서대 일본지역연구과 석사과정)
권은영 (28·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이승문 (25·연세대 사학과 3학년)
사회자= 최근 일본에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 젊은이들도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각국에서 현재 정치적인 이슈, 특히 젊은이들의 관심 사항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사사노 미사에(29·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 석사)= 일본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제가 좋을 때는 굳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살 만했으니까. (경제·사회적) 어둠 속에서 정치를 가깝게 느끼는 변화가 찾아온 것 같다.
이승문(24·연세대 사학과)= 한국에서 20대가 관심을 갖는 정치 문제는 바로 '20대 문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청년 실업 등의 병폐가 정치적 이슈이지 않는가. 일본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비슷한 청년 문제가 불거지고 결국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고 들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세대가 국경을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이슈가 생긴 것 같다.
권은영(27·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투표율이나 정당지지율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얼마나 내느냐를 기준으로 한다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타부치 타카아키(25·동서대 일본지역연구과 전공)= 나는 한국에 와서 데모 행진을 처음 봤다. 참가자는 대부분 젊은 사람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경제난 탓에 정치에 관심은 생겼지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직 조심스러워 한다.
사사노= 광우병 시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일본도 10년 전 같은 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개인적으로 고기를 안 사 먹고 뉴스에서도 고기의 질을 따졌을 뿐 시위 같은 집단적 행동은 없었다. 한국에 와서 그런 운동을 봤을 때 굉장히 놀랐다.
정치 이야기는 자연스레 과거 양국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두 나라 사회에 미친 영향으로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한일병합 100년'이나 '한국전쟁 발발 60년' 같은 기념비적 숫자에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2010년이 이주노동자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는 해가 되기를 기대했다.
사사노= 내 아버지는 민단에서 일하신 한국계다. 그런데 우리 5남매 가운데 한국인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 것은 나뿐이고, 나머지 넷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한다.
민단에 따르면, 재일동포 80% 이상이 일본인과 결혼하고 있고, 재일동포 3, 4세는 민족학교도 다니지 않은 사람이 많다. 이런 까닭에 재일동포의 상당수가 뉴카마(new commerㆍ80년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를 보면 같은 한국인이라도 외국인으로 보고 적대시한다.
반대로 나는 한국에 와 스스로를 동포로 생각했는데 재외동포법의 규정에 따르면 동포의 대상이 아니더라. 대부분의 한국인은 재일동포에 너무 무관심하기도 하다.
사회자= 우리 사회가 재일동포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제대로 연구를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재일동포를 디아스포라(이산)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권은영= 1910년 한일병합의 논리와 지금 이주 노동자를 다루는 한국 정부의 논리는 비슷한 점이 있다. 병합 당시 일본은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다 가져가 세계의 비난을 샀는데, 그때 일본이 내세운 논리가 '일본의 실정법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반면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자연법'을 주장했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 정부는 실정법을 내세워 불법 체류자를 마구잡이로 내쫓고 있으면서, 자연법 상의 인간적 권리는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타부치= 재일동포도 여러 종류로 나뉘는 것 같다. 재일동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 스스로 일본인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들 중에는 한국전쟁 후 일본으로 밀입국한 한국인도 많다고 들었다. 일제 시대에 강제적으로 끌려온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일본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밀입국자들이 섞여 있어 보상하기 곤란하다고 여기는 일본인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사노= 과거사를 지울 순 없지만 계속 보상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양국관계에 좋지 않은 것 같다. 독일도 손자의 세대까지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은 정권에 따라 태도가 바뀌어왔기 때문에 한 번 공식적으로 사과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대신 한국도 일본 정부만 탓할 것이 아니라 과거사 청산을 조건으로 일본에 돈을 받고도 숨긴 박정희 정권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자= 요즘은 "한일 관계는 이제 역사의 시대에서 사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흔히 양국 관계를 '국가'나 '국민' 단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굉장히 구체적 차원에서 공유할 수 있는 문제가 많을 것이다.
권은영= 양국을 얘기할 때 '한국'이나 '일본'으로 묶을 수 있는 정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일례로 "일본은 한국에 부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그렇다.
사실 나는 이 문제를 심각히 느끼지 못하는 세대다. 마치 지금이 1910년이라도 되는 듯이 모두가 '한국과 일본'이라는 관계 속에 포함되는 것처럼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타부치= 사실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에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없다. 오히려 고이즈미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고 일본대사관에 달걀을 던지는 한국 단체의 모습이 보도될 때마다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쌓였다. 일본의 국조(國鳥)인 따오기의 목을 자르는 퍼포먼스는 너무 과격했다.
사사노= 일본인은 한국인이 일본에 과도한 관심을 보인 것과 달리 한국에 무관심해왔다. 이 맥락에서 한류 문화는 양국의 공통된 관심사로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욘사마나 원빈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위문화를 시작으로 역사 등의 분야까지 관심을 높이기 위해 나처럼 한국에서 유학한 사람의 역할도 크다고 생각한다.
권은영= 나는 한류가 매우 위험한 측면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정치가 표상하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한류라는 대중 문화에는 굉장히 이미지의 거품이 끼어 있다. 양국이 만나는 계기가 될 순 있겠지만, 순간적인 붐을 타고 떠오르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승문= 지금도 패션 같은 분야는 일본이 최첨단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젊은이가 많다. 반면 인터넷 공간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큰 경향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사사노= 마찬가지로 일본의 넷우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적대시하고 욕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뭐든 불만이 많을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
한일 젊은이들이 가장 큰 시각차를 드러낸 부분은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리고 이 태도는 경제공동체 구상 등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시각차로 이어졌다.
사사노= 일본인들은 핵무기와 납치 문제 때문에 북한에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냉전체제가 끝난 지금까지 북한이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나는 세계사회의 비판을 받는 그들의 독재가 남한의 군사정권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남북한의 분열이 재일동포까지 연장되는 점이 아쉽다.
타부치= 북한은 어떤 때는 웃기는 나라이고, 또 어떤 때는 위험한 나라인 것 같다. 잘 모르겠다. 핵실험이나 미사일을 발사해 일본을 극도로 긴장시키기도 하지만, 김정일의 장남이 일본에 밀입국해 디즈니랜드에 갔다는 뉴스를 들으면 황당하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주로 유화정책을 쓰고 있지만, 제재나 강압적 대응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권은영= 북한은 고립된 사회이기 때문에 무얼 해도 크게 드러나 보이?측면이 있다. 사실 군수사업의 규모는 미국이 가장 크고 일본이나 한국도 작지 않다. 어쩌면 살아 남기 위해 하는 북한의 행동들이 본질 이상으로 주목을 받다 보니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이승문= 북한 내부에도 여러 층차가 있을텐데 북한을 단일한 구성체로 보고 있어 아쉽다. 역사적 존재, 한중일 관계 속의 존재로 볼 필요가 있다. 이제 한국까지 미국이나 일본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나는 북한 사람들이 훨씬 큰 두려움을 느끼리라고 본다.
사회자= 아시아 경제 통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권은영= 경제적 통합은 정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타고 FTA 등의 형태로 이미 진행되고 있다. 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통합에도 부정적이다.
사사노= 동감이다. 앞으로 동아시아가 EU처럼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화 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본다. 어느 나라가 중심일지, 어떤 통화로 통일할지, 한일중 어느 나라도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지리적 구분도 모호하다.
이승문= 나는 통합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한반도의 여전한 냉전체제에서 적극적인 평화의 계기를 찾아야 하는데, 동아시아 통합체가 건설되면 북한이 어떤 형태로든 포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또 오키나와에서의 미군기지 반대 운동이 한국의 반대운동과 연대하는 등 동아시아 차원의 평화운동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정리= 유상호기자 shy@hk.co.kr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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