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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수교 20년, 동구를 가다/ 그루지야·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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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수교 20년, 동구를 가다/ 그루지야·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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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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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서 자동차로 40분 가량 북서쪽으로 달리면 회색빛깔의 오래되고 고즈넉한 도시가 나타난다.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고리(Gori)다.

고리는 2008년 러시아로부터 폭격을 받은 도시로 더 유명해졌다. 당시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1991년 구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홀로 서지 못한 그루지야의 현실을 핏빛으로 보여줬다.

2008년 8월 그루지야에서 분리를 원하는 남오세티아의 분리주의 민병대가 그루지야 군용차량을 공격하자, 그루지야는 남오세티아 수도 츠한발리 침공을 감행했다. 군,민간인 등 2,000여명이 사망했다. 러시아는 평화유지군 소속 자국 군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고리에 대한 보복 폭격에 나섰다.

공격은 그루지야가 먼저 했지만 러시아가 이를 유도했다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로, 그루지야가 많은 것을 잃은 전쟁이었다. 이후 남오세티아에는 러시아군이 상주하게 됐고, 러시아와 직항이 끊겼으며 그루지야 특산 와인과 광천수를 러시아에 수출할 수 없게 됐다.

고리에는 아직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리시 외곽 언덕에 있는 난민촌이 그것이다. 전쟁의 불안 때문에 떠나온 남오세티아 시민 등을 위해 그루지야 정부의 지원으로 건설됐다.

기자가 고리를 찾은 구랍 9일. 추운 날씨 속에 난민촌에서 뛰어 노는 몇몇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이 어른들의 굳은 표정과 대비됐다. 고리 시민인 올가 토프치시빌리씨는 "그때 민간인이 15명 정도 희생됐다"며 "지금도 무섭다"고 말했다. 고리에서는 군인 포함 총 80여명이 숨졌다.

난민촌에서 멀지 않은 시내의 스탈린 박물관을 찾았다. 스탈린의 생가와 그가 사용했던 전차까지 보존돼 있지만, 개보수 흔적이 없을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그루지야인들이 스탈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트빌리시 국립대학 역사학자 마리카 로키파니제 교수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그는 다른 역사적 인물과 달리 현재 남겨놓은 것은 거의 없다"고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이제 러시아와 관계복원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직 이르다"고 잘랐다. 그리고 소련이 전혀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그루지야를 장악하기 위해 언어를 뿌리 뽑으려 했던 과거사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1980년대 독립운동을 했다는 같은 대학 자바 사무시아 교수는 그루지야의 선제공격에 대해 질문하자 "만약 서울에 외국인이 들어와서 독립을 주장한다면 용납하겠냐"며 "남오세티아는 그루지야의 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대학생 이라크 리씨는 "정치는 정치일 뿐, 나는 러시아가 좋다"며 "그루지야인들은 생각이 저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수없이 침략당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루지야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니노 카카바제씨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이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며 강대국에 기대지 않고도 강한 나라로 일어설 날을 고대했다.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 늦은 첫 눈이 내린 구랍 5일. 2005년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튤립 혁명'의 현장인 알라토 광장을 찾았다. 구 소련 시절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에르킨딕 스타투야스(자유의 여신상)'가 들어서 있었다.

2005년 혁명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키르기즈. 그러나 키르기즈 사람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평가절하 하고 있었다. 졸도시 자느쟈코프씨는 "혁명 때 남부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1만5,000명 가량 모였는데, 야권에서 돈을 받고 움직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낮은 소득과 공직 부패는 냉소의 원인이다. 키르기즈인 상당수는 오쉬 시장, 드르도이 의류시장 등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팔면서 생활하는데, 공무원에게 자릿세를 내야 한다. 인맥이 있으면 공무원이 될 수 있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있다. 국가를 믿을 수 없으니,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소득은 최대한 숨긴다. 제조업 기반이 없어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물가는 높다.

중앙아시아 자원강국 카자흐스탄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카자흐 대통령 직속 전략연구소 레일라 마라토브나 무자파로바 부소장은 급격한 경제성장 수치를 보여주며 "한국, 말레이시아의 성장모델을 벤치마킹해 2030년 장기경제성장 계획도 수립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상고등교육, 연금제도, 과학자 우대 등과 같은 구 소련의 장점을 잇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자흐도 만연한 공직부패가 성장의 기틀을 좀 먹고 있었다. 심지어 알마티 공항에서 출국하는 기자의 여권을 심사하던 공무원이 좀처럼 통과를 시켜주지 않다가, 2,000텡게(약 1만5,000원)를 주자 즉시 통과시켜줬다.

"경찰, 공무원 할 것 없이 돈을 달라고 무슨 트집을 잡을 지 모른다"는 카자흐 한국 교민의 언질 대로다. 무자파로바 부소장은 "부패문제는 가장 어려운 숙제"라며 "중국처럼 처형할 수도 없고, 교육을 통해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자흐 모 정유업체 중역인 탈가트 깔쿠조프씨는 부패의 원인은 권력층이라고 말했다. 그는"대통령 가족, 친인척들이 유전을 비롯한 이권을 갖고 천문학적인 돈을 챙겨왔다는 것은 국민들이 다 안다"며 "부패한 대통령이 있는 한 희망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소련 체제에서 국민들이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됐고 그것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고 심리를 설명한 뒤, "하지만 저력 있는 국민들이기 때문에 결국 이겨낼 것"이라고 희망을 얘기했다.

고리·트빌리시·비슈케크·알마티

글·사진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 키르기즈 야당 당수 로자 오툰바예바

키르기스스탄 '튤립 혁명'에 참여했던 로자 오툰바예바 키르기즈 야당 사회민주당 당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중앙아시아의 민주주의에 대해 한탄했다. 그는 "중앙아시아 대통령들은 대선에서 99% 득표율을 보이곤 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아시아의 '자유의 섬'으로 불리는 키르기즈는 2005년 유일하게 혁명에 성공한 후, 신 정권이 들어섰지만 다시 독재로 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은 지난해 85%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오툰바예바

당수는 "공무원들이 동원돼 부정선거가 난무했다"며 "혁명 동지들이 대통령으로 추대한 바키예프 대통령이 친인척과 자녀에게 이권을 맡기며 독재자가 됐다"고 비판했다. 최근에는 야권 언론인이 암살당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는 "국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키르기즈는 혁명 이후 대통령 임기가 재선으로 한정되는 등 그나마 발전된 헌법을 가지게 됐다. 주변국들의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학자 출신이었던 키르기즈의 전임 대통령이 온건했기 때문에 순순히 물러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주변국의 분석이다.

실제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1991년 독립 이후 줄곧 대통령을 하고 있다. 그들은 2003년 그루지야 '장미 혁명'과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2004~2005년 민주화 운동 움직임이 일자, 강제 진압에 나섰다. 특히 우즈벡 안디잔 지역 유혈 진압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비난을 초래했었다.

글ㆍ사진 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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