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6일 오전 7시20분. 서울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출발한 전동차가 미끄러지듯 삼각지역에 들어섰다. 출근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복잡한 이곳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하행선 맨 끝 승강장 앞에 말끔하게 정복을 갖춰 입은 이재호(57) 서울메트로 삼각지서비스센터장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오른손에 지팡이들 든 시각장애인 김형철(51)씨가 내리고 왼손으로 이 센터장의 팔꿈치를 잡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김씨가 매표소 근처로 올라와 출구 쪽으로 방향을 틀자 이 센터장이 허리춤에 찬 리모컨을 눌렀다. 이어 천장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용 음성안내기에서 "좌측의 5번 출구로 나가면 국립서울맹학교가 있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온다. 이 센터장은 김씨를 안내하며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거쳐 5번 출구를 빠져 나왔고, 두 사람은 도로 중앙의 점자블록 위를 사뿐히 걸어 용산구 한강로2가의 서울맹학교에 도착했다.
서울맹학교에서 물리치료 재활사 과정을 이수중인 김씨는 아침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출발할 때 그쪽 역무원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 역무원이 삼각지역에 전동차 넘버와 도착시간을 알려주면 이쪽 역무원이 마중을 나가는 식으로 '승차 도우미'편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이 센터장의 팔꿈치에 닿은 제 손이 내려가면 오르막길이고 반대로 올라가면 내리막길이란 걸 알 수 있다"며 "삼각지역 역무원 분들의 도움이 없을 때는 가벼운 찰과상은 물론 아찔한 골절까지 입는 경우도 수두룩했다"고 이 센터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 같은 시각장애인 안내 도우미 시스템을 본격화한 주인공은 바로 이재호 센터장이다. 삼각지역에는 매일 20여명의 장애학생들이 직원들의 도움으로 안전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씨는 1977년 1호선 시청역 근무를 시작으로 33년째 서울 지하철과 함께 해온 정통 '지하철맨'. 현재는 4호선 충무로~남태령역을 통합관리하는 삼각지서비스센터장이다.
그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2006년 2월 3호선 경복궁역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이씨는 당시 경복궁역을 이용하는 시민들 중 종로구 신교동의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센터장은 "지금은 스크린도어가 있어서 시각장애인 안전사고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는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서 시각장애인이 헤매다 철로에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도 적지않았다"며 "맹학교 학부모들이 통학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사정이 안되는 몇몇 학생들에게 지하철은 공포의 대상일 뿐었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이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경험은 경복궁역 시절 구청을 드나들며 시각장애인들의 사고를 유발했던 지상 출입구 옆 가판대를 옮기도록 한 성과다. 맹학교 학생들이 출입하는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에 바짝 붙어 튀어나와 있는 가판대가 위험천만했지만 서울시에서 허가하는 가판대는 권한 밖의 일이었다.
종로구청을 찾아가 이런 문제를 설명했지만 가판대 역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허가한 것이라 쉽지 않다는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씨는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위험성을 호소했고 결국 1년2개월만에 가판대를 없애게 됐다. 가판대가 없어지면서 보행도로 한쪽에 치우쳐있던 점자블록도 지하철 출입구를 나오자마자 코앞에서 연결되도록 다시 설치했다.
"1~4호선 지하철은 1편성이 10량이나 돼 세계적으로도 월등한 수송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1칸에 평소 150명, 출퇴근시간엔 200명, 2호선 사당역을 지날 땐 320명에 이를 만큼 이용승객이 많은데 하루하루 긴장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지하철의 안전은 시민의 안전과 직결되고 우리 직원들 노력에 따라 시민들이 생업에 무사히 종사할 수 있으니 이보다 보람찬 직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센터장은 "공공부문에 대한 시민들의 서비스 요구수준이 쫓아가기 힘들만큼 발전하고 있어 공세적인 서비스마인드를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지난 달 19일에는 삼각지센터 직원 10여명이 서울맹학교에 가서 대강당과 체력단련실, 교실 등을 돌며 청소봉사를 하는가 하면 지난 달 21일에는 서울맹학교 학생 및 지도교사 20여명을 초청해 지하철이용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간담회도 가졌다.
또 시각장애인이 장애인화장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문 앞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 위치를 안내한다. 정병두 삼각지 역장은 "전국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하기 편한 역이 이곳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지난 해 3월에는 서울맹학교와 상호교류 협약식을 갖고 교통카드 분실방지 케이스도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삼각지역의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에 답례도 돌아왔다. 지난 해 여름부터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삼각지역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번씩 안마봉사를 시작했다. 이들의 안마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자 어르신들이 지하철역 직원휴게실로 모여들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지하철역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 역할도 하게 된 셈이다.
이 센터장은 "연말연시라 술에 취한 시민들이 승강장에 많이 노출돼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철커덕 내려앉는다"면서 "시민들의 안전의식이 더욱 높아지고 편안하고 친근한 지하철이 되도록 정년퇴임하는 그 날까지 긴장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 서울메트로 사회공헌
서울 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사장 김상돈)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파업철''지옥철'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깨끗하고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데 이어 이제 나눔문화 확산을 주도하는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올해 개통 36주년을 맞은 서울메트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승객을 수송하는 대표적 지하철 운영기관이다. 1987년 노조가 설립된 이후 매년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았고, 5차례에 걸친 전면 파업으로 '파업철'이란 오명도 얻었다. 그러나 2008년 11월 파업을 목전에 두고 노사가 전격 합의했고 지난 해 2월에는 노사정 화합 및 사회공언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달 4일에는 임금 동결에 동의하는 등 5년 연속 '무분규'를 달성했다. 이런 기반을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에 나서면서 봉사활동 실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등 대표적 사회공헌 기관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메트로의 사회공헌활동은 2008년 11월 서울메트로 봉사단을 창단하면서 본격화했고, 지난 해는 '나눔 경영의 원년'으로 선포하면서 사회공헌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사회복지사를 포함한 5명의 인원으로 이뤄진 사회공헌활동 전담팀을 구성, 조직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또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서울시 복지재단 ▦서울시 자원봉사센터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함께하는 사람들 등 전문복지기관과 업무협약을 체결, 파트너십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까지 8,427명의 직원이 자체 자원봉사단에 가입했으며, 6,838명의 직원이 '매칭그랜트'(임직원이 내는 기부금만큼 기업에서도 동일액을 기부하는 제도)에 가입했다. 사회봉사 실적도 올해 들어서만 4만1,450회 19만7,335시간에 달하고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금은 7억2,817만원에 이른다.
이처럼 서울메트로 사회공헌 활동의 특징은 부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전사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분야에서는 장애인과 함께하는 희망마라톤대회를 비롯해 각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141개의 복지시설과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또 '1사 1촌' 자매결연을 기존 1개 마을에서 올해 7개 마을로 확대하고 도ㆍ농간 교류와 일손돕기운동을 활성화했다.
저소득층 분야에서는 서울메트로 기술부서 직원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자매결연을 체결한 복지시설의 각종 설비를 수리ㆍ정비하는 것은 물론 서울시에서 주최하는'희망의 러브하우스 짓기' 행사에도 참여해 212가구를 수리했다.
더욱이 지난 해 9월에는 한국일보와 국민은행이 함께 펼치고 있는 '내고장 사랑운동'에 동참했다. 당시 서울메트로 내고장 사랑카드 1호를 발급받은 김상돈 사장은 "직원들의 뜨거운 자원봉사 열기를 활용할 방법을 찾다가 내고장 사랑카드 가입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며 "나눔문화를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범국민 운동에 동참하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내고장 카드는 현재 2,500여명의 직원이 가입했으며 올해에는 전직원이 참여토록 할 예정이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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