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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1910년 8월 22일, 그때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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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1910년 8월 22일, 그때 무슨 일이…

입력
2010.01.0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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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 '국권 포기' 서명… 우는 대신 없었다

1910년 8월 22일 순종과 고종의 거처인 창덕궁·경운궁을 비롯해 서울 안팎의 요지에는 약 2,600여명의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들이 배치되었다.

들은 30미터 간격으로 늘어선 채 두 사람만 이야기하고 있어도 신문할 정도로 삼엄하게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처럼 계엄과 다름없는 살벌한 상황 아래 창덕궁에서 순종과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내각 대신 등이 참석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말이 어전회의이지 실제로는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아내는 자리였다.

종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한국의 통치를 일본에 '양여'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전권위임장에 서명하였다. 최고 통치자인 순종이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않은 채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순간이었지만, 이에 반대하거나 목놓아 우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어 이완용은 전권위임장을 갖고 통감 관저로 가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탈한 뒤 한국민의 거센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를 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원래 8월 26일에 조약을 공포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날이 순종의 황제즉위일이란 점을 고려해 29일로 날짜를 바꾸었던 것이다.

제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말미암아 신문기자조차 26일 통감부측의 기자회견으로 비로소 조약 체결 사실을 알게 되었고, 28일 오후에 조약문 등을 제공받아 그 다음날 보도했을 정도였다.

8월 29일 순종은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 '한일병합조약'

'한일병합조약'은 한국 황제가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천황에게 '양여'하며, 일본 천황이 이를 '수락'하고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일제는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형식적이나마 합법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했지만, 외부대신의 날인을 받는 데 급급한 나머지 공식 명칭마저 써놓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을사늑약'의 강제성·불법성 시비로 곤욕을 치른 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일제는 정식 조약의 요건을 갖추려고 애썼지만, 역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었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해 전권위임장을 요구하거나 한국민의 거센 저항으로 조약이 비준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전 승인이라는 편법까지 동원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제는 조약의 명칭을 정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병탄'은 한국을 강점했다는 침략적인 성격이 너무 드러나서 차마 사용할 수 없었고, 두 나라가 형식적이나마 동등하게 합친다는 의미의 '합방'도 스스로 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지금까지 별로 사용하지 않던 '병합'이란 문자를 새롭게 고안해냈다. '병합'이 한국을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로 삼는다는 의미가 '합병'보다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병합'은 한국이 아주 '폐멸(廢滅)'되어서 일제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을 명확하게 하되,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는 않다는 점을 고려한 용어였다.

이처럼 일제는 한국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강점한 진실을 은폐하되 그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야말로 간교하게 '병합'이란 용어를 새로 고안해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병합'은 물론이고 일제 스스로도 꺼려한 '합방'이란 말을 오히려 스스럼없이 쓰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병합'과 '합병'의 뉘앙스 차이를 정확히 구별하기는커녕 '강점' 혹은 '병탄'의 뜻조차 희석된 '합방'이란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오늘날 우리의 허약한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역사의 거울에 비춰본 100년 전 '한국병탄'

왜 우리나라는 일제에 강점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너무도 쉽고 분명하다. 일제가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메이지유신(1868)을 계기로 서구 열강의 군사적·경제적 침략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제는 자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오로지 '주권선'(영토)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판단 아래 반드시 '이익선'에 해당하는 한국을 차지해야 한다는 정략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일제는 군비를 확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중국·미국·영국·러시아 등 열강과 조약을 맺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또한 일제는 우리의 외교권·사법권·군사권을 강탈하고 고종마저 퇴위시켰다.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의병전쟁을 비롯한 한국민의 거센 저항과 반발에 부딪히자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거나 각종 악법을 만들어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근대국가 발전 기회 완전히 뺏겨 '식민지 후유증' 여전히 양국 현안

일제가 준 민족의 고통 잊지 말되 무능·부패 등 내부 원인도 반성을

특히 1909년 9월부터 일제는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쳐 한국 내 반일무장세력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한국을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한국 강점은 우리 민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근대국가를 수립할 기회를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항전했던 이름없는 의병들의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면면하게 이어졌다.

그 결과 우리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되찾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국민 주권을 확립함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야만적인 무력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향해 줄기차게 투쟁한 세계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일본의 한국 강점 100년을 맞이한 올해, 우리는 역사에서 어떠한 교훈을 되새겨야 할까? 무엇보다 일본이 한국민을 불행에 빠트린 사실 자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일본군 성노예·독도 영유권·강제징용자·재일교포 문제 등 한·일간에 갈등을 빚는 주요 현안들은 일본의 한국 강점이 남긴 후유증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과거의 침략 행위를 인정하기는커녕 합리화하거나 미화하려는 경향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발판의 마련은 바로 과거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고 반성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는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라도 결코 합리화될 수 없지만, 나라를 빼앗긴 내적 원인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단순히 일본의 탓으로 돌리거나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에게 전가하는 데 머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자주독립과 동시에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채, 무능과 부패로 말미암아 '국치(國恥)'를 당한 잘못도 철저하게 되짚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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