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는 조직적 동물 분류체계가 없었지만 척추동물을 네 가지로 나누는 체계의식은 있었다. 비늘을 가진 인충(鱗蟲), 털이 난 모충(毛蟲), 날개가 돋은 익충(翼蟲), 딱딱한 등껍질의 갑충(甲蟲)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 포유류 꼭대기에 영장류를 두듯, 네 종류마다 으뜸 동물을 하나씩 두었다. 네 종류의 으뜸 동물은 나중에 오행사상과 결합하면서 각각의 방위와 색깔을 가졌다. 인충의 으뜸인 청룡은 동쪽, 모충의 왕인 백호는 서쪽, 익충의 정상인 주작은 남쪽, 갑충의 왕인 현무는 북쪽의 수호신으로 각각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탄생한 사신 가운데 백호는 유일하게 현실세계의 동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물원에서도 쉬이 보지만, 사신이 태어난 고대는 물론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좀처럼 현실의 동물로 여기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 에 따르면 태종 8년인 1404년 11월 이지(李至)가 전하기를 명(明) 태종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짐승과 새끼를 사로잡았다. 검은 무늬의 백호였는데 백관이 성군(聖君)의 치세에 출현한다는 신령스러운 동물인 '추우(騶虞)'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그 짐승이 신비한 모습과는 딴판으로 날고기를 먹어 놀라움을 던졌다. 조선왕조실록>
■백호가 호랑이 가운데 유난히 힘세고, 용맹하고, 사나운 별종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마땅한 근거가 없다. 확률적으로 드물게 나타나는 돌연변이일 뿐이다. 시베리아 호랑이뿐만 아니라 자바 호랑이도 흰 것이 있고, 색깔 구별 없이 영역다툼을 벌인다는 점에서 특별히 시베리아 눈밭에서 사냥하기 적합하게 진화한 결과라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기 어렵다. 중년 세대가 만화영화 <밀림의 왕자 레오> 를 통해 흰 사자에 대해 특별한 관념을 가졌듯, 동양 전래의 사신 사상이나 민담과 설화, 민화 등을 통해 익숙해지고 굳어진 속성을 백호에게 부여한 결과다. 밀림의>
■내일이면 백호의 해인 경인년 새해다. 오행을 믿지는 않지만 푸르스름한 흰 빛을 머금은 칼날 같은 '경'의 쇠(金) 기운을 띤 백호의 해는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60년 전 경인년에 터진 한국전쟁 같은 비극이야 다시 없겠지만, 세종시 건설 방안 등을 둘러싼 한결 날카로워질 사회적 논란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짊(仁) 과 지혜(智) 겸손(禮)을 잊은 채 '경'의 기운대로 자신이 옳다(義)고 내닫는 것은 정치적 비극이다. 호랑이 송곳니 같은 위엄보다는 민화의 백호처럼 여유롭고 따스한 정치를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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