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 '엄마'가 딸의 소설을 읽으려는 시도를 했다. 초저녁이었는데도 책을 펼쳐든 두 눈꺼풀이 잠 기운으로 무거웠다. 그런 엄마의 눈이 반짝 빛난 건 드라마의 타이틀 곡이 흐를 때였다. 내 책은 첫 페이지에서 더 나가지도 못했다. 엄마와 드라마를 보았다. 에이, 빤한 사랑 이야기. 처음 봐도 누가 누구와 어떻고 무슨 일이 있는지 짐작이 갔다.
사실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어머니가 나보다 한 수 위다. 연륜 때문이기도 하고 연륜이 다가 아니기도 하다. 드라마를 볼 때 엄마가 슬쩍 와서 물을 때도 있다. "뭔 이야기냐?" 무슨 이야긴 줄 몰라 묻는 게 아니다. 엄마는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엄마는 왜 내 책을 읽지 못하는 걸까. 루쉰의 말이 떠오른다. 민중의 삶에서 비롯된 노래와 시 등이 이상하게도 지식인에 의해 글이 되면 너무도 어려워진다, 그것들이 화석처럼 굳으면 그들은 또 다른 걸 찾아내 다시 그 생명을 죽여버린다.
'길 위의 이야기'를 쓰는 동안 종종 엄마가 물었다. "오늘은 뭔 이야기냐?" 괜한 동생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언니 힘들 땐, 좀 나눠 써줘라." 엄마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바로 그런 것.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딱딱해지고 굳어졌을 생명체와 비생명체들을 풀어놓는다. 다시 길 위로 돌아가기를.
'하성란의 길 위의 이야기'는 오늘로 끝납니다. 내년 1월 1일부터는 시인 정일근씨가 연재합니다. 1년여 동안 집필해 주신 하성란씨에게 감사 드립니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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