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비바람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서 혼자 힘으로 병을 이겨냈어요. 살고 싶은 의욕이 그만큼 강했던 게지. 하물며 동물도 그런데 사람이 의지만 있다면 장애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경주마 '백광(白光)'의 이름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4,000만원을 기부한 마주(馬主) 이수홍(80)씨. 그는 백광이 올해 받은 상금의 일부인 이 돈을 장애인 재활치료를 돕는데 써달라고 했다. 29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백광이 난치병을 이겨낸 과정을 소상히 일러주면서 "이 녀석 이야기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섯 살배기 백마 백광은 2003년부터 경주마로 뛰면서 4년간 통산 21전 10승, 승률 47.6%를 기록한 명마다. 2006년에는 대상경주 3연속 우승이라는 신화를 썼다. 제 이름처럼 빛의 속도로 내달린다 해 '은빛가속도'라는 별명이 붙었고, 수 십 명의 열혈 팬도 거느렸다.
백광에게 병마가 찾아 든 것은 2007년. 무릎 인대가 늘어나는 '좌중수부계인대염'이란 난치병에 걸려 더 이상 경주마로 뛸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마주 이수홍ㆍ황영금(78)씨 부부는 자식처럼 아끼던 백광을 위해 백방으로 치료책을 찾았다. 한 바이오업체 지원으로 줄기세포 치료까지 받았다. "줄기세포 치료가 미국, 호주 등에서 성공한 사례가 있지만, 사실 완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죠."
치료 이후에도 회복이 더디자 이씨는 지난해 11월 배대선 조교사와 상의한 끝에 백광을 제주도 해변가에 있는 산방산 목장에 풀어놓기로 했다. 그는 "병원치료, 한방요법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줬는데도 쉽게 낫질 않아 마지막 수단으로 '자연으로 돌려보내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올해 새 봄을 맞으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연치유 5개월 만에 백광이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기적이 따로 없지요. 마구간도 없고, 나무도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에서 비와 바람을 다 맞아가며 홀로 병마와 싸운 이 놈의 근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병마를 이겨낸 백광은 10월 과천에서 열린 '토요경마 제11경주'에서 우승을 했다. 2007년 4월 이후 꼬박 30개월 만에 거머쥔 승리였다. 연이어 11월 국내 최고 경주마를 가리는 대통령배(G1) 대상경주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이씨 부부의 극진한 사랑에 보답했다.
경주마는 한 번 쓰러지면 다시 경주로에 서기 힘들다. 마방(馬房) 비용만 한 달 평균 80만~100만원 가량이 드는데다 재기 가능성도 희박해 마주들 대부분이 안락사를 택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실낱 같은 희망에 기대 재활을 택한 것에 대해 "가족 같은 놈을 어찌 포기하느냐"고 말했다.
1992년 개인마주제도가 도입됐을 때부터 평균 8~10마리의 말을 보유해온 이씨는 "내게 말은 오락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가족"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백광과 인연을 맺은 것은 백광의 누나 '소백수(少白水)'를 통해서다. "2002년 제주에 말을 사러 갔는데 소백수는 워낙 체구가 작아 다들 외면하더라고. 그런데 내 눈에는 그 놈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어. 그게 인연이지 싶더군." 뒤이어 한 살 터울인 백광과 여동생 '백파(白波)'까지 모두 그의 소중한 가족이 됐다.
그는 가족과 함께 일주일에 두 번 과천에 있는 마방을 찾는다. 마주 생활 18년 동안 거르지 않은 일정이다. 백광은 이씨의 차가 보이면 "이히힝" 하는 소리와 함께 가장 먼저 그를 반긴단다. "말들이 좋아하는 당근과 사과를 두 손 가득 들고 이 곳을 찾는 일이 가장 큰 낙이에요. 경주에서 1등을 하는 것보다 말이 즐겁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일이 더 큰 기쁨이에요."
백광은 올해 네 경기에 나가 총 1억8,000만원의 상금을 타 국내 경주마 수득상금 순위 15위를 기록했다. 1등부터 50등까지 경주마들이 대부분 10회 안팎 출주한 것을 감안하면 꽤 우수한 성적이다. 이씨는 "건강하게 뛸 수만 있다면 꼴등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동물로는 첫 기부자인 백광을 '희망2009 나눔캠페인'의 제30호 행복나누미로 선정했다. 이 캠페인은 이달 1일부터 내년 1월31일까지 62일 동안 기부액에 관계없이 특별한 사연을 지닌 기부자를 매일 한 사람씩 행복나누미를 선정해 '나눔의 나눔'을 널리 퍼트리기 위한 것이다.
김동수 공동모금회 회장은 "자식처럼 사랑하는 동물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도 참 즐겁고 기쁜 일"이라며 "백광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씨가 속한 서울마주협회의 다른 마주 3명도 대상경주 우승마인 '동반의 강자' '불패기상' '나이스초이스'의 이름으로 총 8,000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3곳에 기부했다. 가슴 훈훈한 말들의 기부 릴레이가 세밑 한파를 녹이고 있다.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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