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눈이 내려 도로는 아직도 얼어 있다. 차와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오간다. 추운 날씨는 기후변화센타의 송년모임에서 외친 '사랑은 뜨겁게 지구는 차갑게'라는 구호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앞으로 더 큰 눈이 내린다고 한다.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2009년은 나에게 힘들었던 일과 행복했던 일들이 어느 때보다도 많았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줄리엣비노쉬, 레이디가가, 김연아 등 많은 월드 스타들과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뉴욕에 새로운 사무실을 오픈 했고, 쿠웨이트에도 매장을 준비 중이며, 또 파리컬렉션을 통해 해외 비즈니스도 꾸려나가고 있다.
반면 올해 나에게 일어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컬렉션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동생의 일이었다. 파리로 떠나기로 한 날이 발인이어서 마지막까지도 함께 하지 못한 내 자신이 지금도 원망스럽기만 하다.
이처럼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은 최근 발행된 보그 신년호에 게재된 특집 화보였다. 지난 파리 컬렉션을 위해 조각가 박승모 작가와 함께한 작업들이 더욱 멋진 화보로 편집돼 너무나 힘들었던 그간의 노고에 대한 값진 보상처럼 여겨졌다. 이번 특집을 준비한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연말에 있었던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작업은 코엑스에서 열렸던 '2009 코리아 카우 퍼레이드'였다. 이상국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축우지변'을 테마로 오랜 농경사회의 전통으로부터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민족의 집단의식에 깊게 자리 잡은 영물이자 자산으로서 '소'의 의미를 표현해보고자 했다.
작업은 먼저 청정을 상징하는 초록으로 소를 칠한 후 '즐거운 나의 집'에 나오는 한글 한 자 한 자씩을 각각의 문양처럼 사각 색동색에 넣어 옷을 입히듯 전체에 붙여 나갔다. 우리 어릴 적 소 한 마리만 있어도 부자라고 했는데 작업하는 동안 진짜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흐뭇했다. 이 전시는 나를 포함해 모두 50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패션디자이너인 나에게 옷이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정부파견 해외봉사단 월드 프렌즈 코리아의 유니폼을 디자인하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옷을 입고 스카프를 받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신도 무척 행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이번 연말 한 방송사에서 주관한 시상식에서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그리고 한국패션협회가 주최한 시상식에서는 코리아패션대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껏 디자이너로 활동을 하면서 상을 몇 차례 받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런 상들에 어색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단지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뛰어온 것뿐인데 내가 이런 상들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상에 걸맞도록 더욱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책임감을 느꼈다.
올 연말 행사와 모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행사는 한불 상공회의소에서 주최한 프랑스 거장 감독인 클로드 를르슈의 영화 '도빌: 남과 여'(Deauville: un homme et une femme)를 테마로 열린 갈라디너였다.
도빌은 내가 파리 패션쇼를 마친 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 시간을 내 종종 들렸던 곳으로, 보통 도빌에 도착해 노르망디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곳들을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가벼운 여정이었다.
이날 행사장의 웨이터들은 멋진 콧수염을 길게 붙이고 모자를 쓰고 있었고, 도빌의 해변을 표현하기 위해 갈매기와 등대 그리고 휴양지 주택들의 모습이 설치돼 마치 도빌 해변을 그대로 행사장인 호텔 안에 옮겨놓은 듯 그럴싸해 보였다.
이곳에서 조일환 전 주프랑스 대사와 '남과 여'의 작곡가 그리고 영화감독인 클로드 를로슈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 멋스러운 자리였다.
연말은 항상 반가운 자리들로 들썩인다. 평소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했기 때문에 연말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여전히 보고 싶은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비록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번 연말과 크리스마스도 평소와 같은 일상처럼 조용히 보내고 있다. 어릴 적 거리로 흘러나온 캐롤 노래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작은 사랑을 나누던 모습들은 이젠 색 바랜 추억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1년을 회상하며 뒤적인 수첩에는 그간의 낙서와 순간순간의 메모들이 흔적처럼 남겨있었다. 흘러간 시간들을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지나간 흔적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백화점과 호텔의 화려한 조명들은 성탄 이후에도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듯, 비록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나는 어렸을 때 꿈꾸었던 동화와 같은 선물처럼 내 안에 희망과 꿈을 담아둘 수 있는 양말을 머리맡에 걸어두고 싶다.
새로운 2010년은 내가 브랜드를 시작한지 25주년, 그리고 디자이너로 활동한지 30주년이 되는 매우 의미 있는 해다. 개인적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멋진 아트북도 기획하고 있고, 연초에는 쿠웨이트 매장의 오픈도 계획돼 있어 벌써부터 바쁜 일정들로 채워지고 있다. 호랑이 해인 이번 새해에는 나를 포함해 모두가 좋아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최근 방송에 연일 입시관련 뉴스를 접하면서 올해 '선배님, 반갑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어린 후배들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전화를 해보았지만 통화를 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이들도 용기를 갖고 원하는 곳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