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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15> 칠지도(七支刀)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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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15> 칠지도(七支刀)의 정체

입력
2009.12.30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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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박물관을 찾아 제2전시실 백제실에 들어서면 전시된 유물 가운데 우리의 눈을 끌고 있는 유물이 하나 있다. 바로 칠지도다. 전시된 칠지도는 모조품이다.

유물 설명서엔 '칠지도란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칼이란 뜻이다. 칼 양면에 새겨진 글자 내용을 보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대에 백제 왕실에서 제작하여 왜(倭) 왕실에 준 것이다'라고 쓰고 칠지도 앞면과 뒷면에 새긴 한자의 뜻을 풀이해 두었다. 제작년도는 369년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왜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진품 칠지도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칠지도의 진품은 일본 나라현 텐리시에 있는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다. 이 신궁은 일본 신무천황(神倵天皇)이 나라를 평정했다는 신검을 모신 곳으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특수상자가 있어 누구도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그런데 1873년에 이 신궁을 관리하고 있던 칸 마사토모가 금기를 깨고 상자를 열어 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몸통에 6가지가 붙어있는 이상하게 생긴 철제품이 상자 속에 들어있어 유심히 관찰했다. 녹으로 덮인 몸통의 녹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다가 61자의 글자를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이 글자를 통해 칼의 이름이 칠지도(七支刀)라는 사실과 만든 내력도 밝혀내게 되었다.

칸 마사토모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이는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기사를 중시하고 즉, 백제왕이 왜왕에 바친 칠지도(七枝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증명하는 자료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하고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발표하여 온 일본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후 63년에 처음으로 북한의 김석형이 이 칠지도에 관심을 갖고 일본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김석형은 칠지도가 5세기 때 강성했던 백제왕이 황제의 입장에서 역내 제후 성격의 지역 통치자(후왕)들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뜨거운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칠지도는 한ㆍ일간 그 제작연대와 동기에 대해 서로의 주장이 상반되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바쳤다는 주장과 백제왕이 일본 왕에게 하사했다는 주장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

제작시기도 136년 전 최초의 발견자인 칸 마사토모가 268년 제작이라고 주장한 후 369년, 372년, 408년, 445년, 468년, 480년 설까지 백가쟁명식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볼 때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인, 그야말로 백제의 국력이 최고에 달했을 당시 제작하여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372년의 제작임이 유력하다.

재미있는 것은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조품 칠지도는 74년에 일본에서 만들어 당시 관북리 부소산 기슭에 신축한 국립부여박물관(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을 개관할 당시 전시했던 것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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