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향이 약하네요. 일본식 막걸리인가?" "향이 비릿한 게 탄산수를 쓴 것 같네요." "글쎄요… 그냥 달짝지근한데요. 전분당(澱粉糖ㆍ녹말가루)이 들어간 거 아닐까요?"
지난 23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막걸리학교'. 사각 탁자에 둘러앉은 7명이 제품명이 가려진 막걸리를 시음(試飮)하고 있다. 향을 맡고, 빛깔을 살피고, 소주잔 양만치 입에 넣고 '굴리기'도 한다.
그들이 작성하는 노트엔 막걸리의 향, 맛, 색, 맛과 향의 조화를 평가하는 십 수 가지 항목들이 들어있다. 예컨대 향과 관련해선 강도, 과실향, 쌀향, 누룩향, 산(酸)향, 특이향 등 6개 항목마다 0~9점을 주게 돼있다.
교육생 40여명이 나눠 앉은 6개 탁자에 익명의 막걸리 6종이 차례로 돌았고, 그 정체를 밝히려 오감을 날카롭게 벼린 교육생들의 귀엔 대학로를 점령한 크리스마스 캐롤 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정년을 앞둔 회사원, 귀향한 중년, 농부가 되려는 젊은이, 애주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이 자리는 '막걸리 소믈리에 양성 과정'. 2기생인 이들은 이달 9일부터 내년 2월10일까지 10주 동안 매주 수요일 야간 교육을 받는다.
최근 막걸리 열풍을 타고 한국전통주연구소 등 주조법을 가르치는 기관은 늘었지만, 막걸리 맛을 감별해 고객 입맛에 맞는 술을 권해주는 소믈리에 교습까지 하는 건 이 곳이 유일하다.
허시명 막걸리학교 원장은 "전국에 수백 종류의 막걸리가 있지만 대부분 '구수하다' '시큼하다' 정도로만 구분한다"며 "막걸리의 진가를 알리려면 각양각색의 맛을 알고 안내해줄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직 정식 직종은 아니지만 갈수록 '막걸리 소믈리에'를 필요로 하는 곳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그의 예측이다.
막걸리 특성을 결정하는 건 주로 곡물 재료, 누룩곰팡이 종류, 첨가물이라고 한다. 쌀 함량이 많을수록 맑은 흰색, 밀가루가 많으면 누렇고 탁한 색을 띤다. 곡물을 발효시키는 누룩으로 백국을 쓰면 신맛이, 황국을 쓰면 단맛이 강하다. 뒷맛을 보면 단맛을 내려 아스파탐, 스테비오사이드 등을 얼마나 넣었는지 알 수 있는데, 그 양이 많을수록 뒷맛이 텁텁하다.
교육생들은 전 주에 이어 국내 막걸리 6종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ㆍ품명을 숨기고 시음하는 것)을 실시했다. 이중엔 일본인 입맛에 맞게 달고 덜 탁하게 만든 수출용 막걸리도 포함됐다. 이들이 시음 평가서 작성을 마치자 허 원장은 막걸리의 실제 성분표를 공개했다. 영 들어맞지 않았다. 초보 소믈리에들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쳤다.
김창수(37)씨는 "색을 보고 쌀과 밀 함량을 파악하는 건 어느 정도 되는데 질감이나 뒷맛, 특히 향을 통해 막걸리 특성을 파악하려면 멀었다"며 "미각과 후각을 더 길러야 할 모양"이라고 말했다. 좋은 소믈리에는 청각까지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허 원장은 조언했다.
"갓 빚은 막걸리는 '졸졸졸' 시냇물 소리를 내며 숙성되고, 이후 '투닥투닥'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를 거쳐 '톡톡톡' 거품 터지는 소리를 내며 익습니다. 그걸 들으며 막걸리 온도를 결정하고 얼마나 저어줄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록존(51)씨는 한 품종의 당분 첨가 비율을 정확히 맞춰 '술도가 아들'의 체면을 차렸다. 이씨 집안은 경남 거창에서 20년 동안 양조장을 했다. '쌀 막걸리 출시' 기사가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큼 막걸리가 국민주(酒) 대접을 받던 시절엔 호황을 누렸던 양조장은 막걸리 소비량이 줄고 부모님도 연로해지면서 7년 전 문을 닫았다.
은행원으로 일하다 3년 전 귀향한 이씨는 가업을 되살릴 생각으로 막걸리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막걸리와 전통 음식을 접목한 관광 상품을 개발, 한국 술문화의 명맥을 되살릴 겁니다."
김시선(52)씨도 막걸리로 '제2의 인생'을 설계 중이다. 김씨와 막걸리의 인연은 독특하다. "1987년 건설 기술자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는데 글쎄, 1,000명이 넘는 우리 일꾼들 먹일 술을 만들라는 거에요. 종교상 술을 금하는 나라에서 말이죠."
그는 궁리 끝에 사막에 흔한 대추야자 열매에 이스트(제빵용 효모), 설탕을 넣어 '막걸리'를 만들었고, 한국 근로자들은 그 밀주로 향수와 고단함을 달랬다. "참 어설펐지만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막걸리 체인점을 세워 그 맛을 되살리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는 막내 길민(19)씨의 포부도 작지 않다. "지역마다 맹주를 자처하는 전통술이 있잖아요. 고향인 강원 홍천을 대표하는 전통주를 만들고 싶습니다." 길씨는 10년 전 귀향해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아버지 길종각(45)씨와 함께 매주 상경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허 원장은 "동기는 다 다르지만 막걸리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들이 대단하다"며 "막장, 막사발, 막소주처럼 '막'은 보통 질이 낮다는 의미로 쓰여왔지만, 막걸리에 대한 이들의 열의 덕에 앞으로 '막'이 명품의 다른 이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이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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